무려 68년, 침묵 속에 잠들어 있던 화살머리고지가 지난해부터 세상에 주목을 받았다. 남북군사 합의를 통해 남과 북이 지목한 화살머리고지! 이후 지금까지 유해발굴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만도 60여 구. 아직도 수많은 유해가 더 있을 거라는데……. 1953년 그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KBS 스페셜은 68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을 동행하며 전쟁의 아픔에 동참한다.
꽃 피는 봄이 오면
지난해, 10월. 남북 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지뢰 제거 작업 중 유해 한 구가 발견됐다. 포탄이 터지며 산산이 부서진 뼛조각과 함께 군번과 이름이 적힌 인식표가 발견됐다. 2사단 31연대 7중대 소속 박재권 이등중사의 것이었다. 봄이면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그의 고향에서는 살아생전, 아들의 유해조차 찾지 못한 부모님이 그를 가슴에 묻은 채 두 눈을 감았다. 그가 속했던 중대가 화살머리고지로 배치되던 날, 그에게 어떤 일이 닥쳤던 것일까. 박재권 이등중사의 68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취재한다.
전쟁의 흔적
지난 6월 1일, 화살머리고지에서 최근 발굴된 프랑스군 전사자 이브 모알릭 상병의 인식표가 67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갔다. 프랑스 제6 증원 파견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알릭 상병은 1952년 10월, 화살머리고지 일대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아직 찾지 못한 프랑스군 유해 중 화살머리고지에 잠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군의 유해 3구. 그들은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군번줄로 돌아온 아버지
지난해 7월, 68년 만에 북한이 미국에 전달한 유해 55상자와 인식표 하나. 미 국방성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DPA)의 유전자(DNA)검사와 신원 확인 작업 끝에 찾은 인식표의 주인. 그는 운산 전투에 참전한 미군 전사자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인 찰스 허버트 맥 다니엘 상사였다. 그가 전쟁에서 실종되던 당시, 아들의 나이는 3살. 어느덧 노인이 된 아들은 68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본 후에야 안도했다. 1950년 10월, 곧 끝날 것 같았던 전쟁에서 그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의 영웅, 아버지의 귀환
1950년 8월. 28살의 나이에 한국전에 참전한 故 윤경혁 일병. 그는 미군 1기병사단에 배치된 지 3개월이 채 지나 않아, 갓난쟁이 아들을 남겨둔 채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아들은 그의 유해라도 찾고 싶어 자신의 DNA 자료를 등록해 놓았다. 북한에서 미군 유해와 섞인 채, 하와이까지 보내진 아버지의 유해가 먼 길을 돌아, 아들과 상봉하게 된 건, 아들의 사부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외롭고 길었던 귀향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68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 아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화살머리고지, 치열했던 전투
지난해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를 채택하면서부터 본격화된 DMZ 내 6.25전사자 공동 유해발굴 작전. 남측에서는 본격적인 남북 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사전취재 차원의 지뢰 제거 및 기초유해발굴에 들어갔다.
한국전쟁 당시 교통과 전략의 중요 요충지이자, 6.25 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를 방어하기 위한 주요 지점이었던 화살머리고지. 휴전 직전까지 벌어진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증명하듯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난 4월 1일부터 발굴된 유해 60 여구, 발굴 유품 3만여 점.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겨진 이곳 화살머리고지가 평화의 땅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6월 6일 목요일 밤 10시 KBS스페셜에서는 평화의 땅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
구천을 떠돌던 무명용사들이 60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취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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