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래 매년 익명 선행 / 전주지역 4449가구 도움 받아 / 마을 주민들도 공동체 만들어 / 수익사업하며 소외계층 후원 / 전국에 '천사효과' 확산되며 / 나눔 동참하는 시민들 늘어나
이름도 얼굴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 없는 천사’는 올해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천사는 지난 2000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말이면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인근에 간단한 쪽지와 함께 기부금을 놓고 갔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거액을 내놓으면서도 이름조차 밝히길 거부하고 있다. 한 때 지역사회에서는 천사가 누구인지, 기부금의 출처는 어디인지 밝혀내려고 했었다. 심지어 일부 언론에서는 잠복취재까지 나섰고, 온갖 소문도 난무했다. 하지만 이 같은 관심은 천사의 순수한 뜻을 지키자는 여론이 퍼지며 잠잠해졌다.
전국 각지에 얼굴 없는 천사 붐을 일으킨 노송동 천사마을의 얼굴 없는 천사가 18년 동안 세밑에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18년 동안 5억5813만8710원
시작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2000년 겨울이었다. 한 초등학생이 심부름이라며, 노송동주민센터 근처에 조그만 상자 하나를 두고 갔다. 안에는 무거운 돼지저금통 하나와 지폐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상자 뚜껑에는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써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짧은 인사가 있었다.
익명의 기부는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계속됐다. 연말마다 노송동주민센터에는 어김없이 전화 한 통이 걸려왔고, 예견된 장소엔 돈이 가득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전화 목소리는 중년의 남성으로 추정됐다.
그렇게 18년이 흘렀고, 총 5억5813만8710원이라는 큰 돈이 기부됐다. 기부금은 연탄과 쌀, 현금 등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졌다. 지난해까지 전주지역 4449가구가 천사의 보살핌을 받았다.
누가, 왜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가며 이런 선행을 하는 것일까.
18년째 이어져 온 천사의 선행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가장 큰 변화는 지역 주민들의 마음가짐이었다. 전주시가 2009년 천사마을 가꾸기 사업을 앞두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시설 증진보다는 살기 좋은 마을이 되는 것을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좋은 마을이란 결국 사람이 행복한 마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전주시 노송동 천사마을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 지역사회로 나눔문화 확산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은 1980년대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 70%에 달하고 주민의 25% 이상이 65세 이상인 전형적인 구도심이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천사가 찾아온 이후 마을은 점차 천사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천사의 온정은 훈훈하게 마을 사람들을 데우기 충분했고, 마을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을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던 주민들은 자치와 경제적 자립이 바탕이 된 마을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2015년 전주형 공동체 사업인 온누리 공동체 ‘천사길 사람들’을 구성했다. 이 공동체는 노송동 천사의 거리를 알리고 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자리와 수익 창출 사업을 바탕으로 마을 환경개선과 소외계층 후원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실제로 이들은 지난해 주민참여형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낡은 건물과 담장에 벽화를 그리고 사계절 꽃들로 넘쳐나는 ‘사계절 천사화단’을 만들어 마을 분위기를 바꿨다. 지난 2월에는 천연염색 제품 판매를 위한 주민자립형 협동조합을 창립해 발생한 수익금으로 ‘천사표 이야기 밥상’ 등을 기부하기도 했다. 천사길 사람들은 이러한 공동체 활동을 인정받아 올해 정부로부터 공동체활동 최우수상을 받았다.
마을 주민들은 집 담장부터 페인트를 칠하고 이웃집과 함께 마음을 공유하면서 사람들이 마을 공방으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재는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참여해 마을을 함께 끌어가고 있다.
△ 천사 기리는 사업도 이어져
노송동 주민들은 천사의 뜻을 기리고, 선행을 본받자는 의미에서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정하고, 불우이웃을 돕는 나눔과 봉사 활동도 펼치고 있다.
지난 2010년 1월에는 천사의 숨은 뜻을 기리고 아름다운 기부문화가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노송동주민센터 화단에 ‘당신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참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얼굴 없는 천사의 비’를 세우기도 했다. 또, 천사가 기부금을 두고 가던 장소는 기부천사쉼터로 꾸몄다.
전주시도 아중로에서 전주제일고 정문에 이르는 260여m 구간을 ‘천사의 거리’로 조성한다. 이 거리를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어 탐방객들에게 볼거리도 제공할 계획이다. 거리 담장에 아트 타일을 활용한 기억의 벽이 조성돼 얼굴 없는 천사와 나눔의 이미지를 담을 예정이다.
천사 이야기는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14년 연극 ‘천사는 바이러스’가 무대에 올려진데 이어 2015년 김성준 감독이 같은 제목의 장편영화를 만들어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JIFF)에서 선보였다.
△전국에 ‘천사 효과’…익명 기부 늘어
해마다 이어진 천사의 선행은 전국에 익명의 기부자들이 늘어나게 하는 ‘천사효과’까지 나타났다.
전주에서도 ‘밥 굶는 아이 없는 엄마의 밥상’등 어려운 이웃들을 후원하는 각종 복지사업에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고 참여하는 ‘천사 시민’들이 늘었다.
전국의 얼굴 없는 천사들이 늘어나며 조명되기도 했다. 충북 제천에도 15년째 선행을 이어 오고 있는 기부 천사가 있다. 그는 지난달 “연탄이 필요한 이웃에게 부탁합니다”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연탄보관증 2만 장(1300만 원 상당)을 기부하고 사라졌다. 대구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천사는 6년째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금을 보낸다. 올해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1억2000여만 원의 수표 한 장을 내놨다. 전남 함평에도 지난 18일 익명의 기부자가 68만1660원을 담은 검은색 비닐봉지를 남겨두고 갔고, 전남 해남에서는 익명의 기부자가 어려운 이웃에게 전해달라며 라면 500박스를 전달하고 사라졌다. 지난 24일 서울 잠실 롯데백화점 구세군 자선냄비에서도 1억5000만 원의 수표가 발견됐다. 자선냄비 익명 기부금으로는 지난 1928년 자선냄비 거리모금이 시작된 이후 최고 액수를 기록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