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국내 최초로 프랑스 치매케어 전문가 이브 지네스트의 워크숍이 실시됐다.
5일에 걸쳐 이루어진 교육. 이브 지네스트는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휴머니튜드의 기본 철학을 설명하고, 병원에서 실제 환자들을 통해 시범을 보였다.
4년째 침대에 누워만 있던 혈관성 치매 환자 김춘경씨. 이브는 그녀를 일으켜 휠체어에 앉혔다. 4년만에 휠체어에 앉은 아내를 보는 남편은 이 광경이 믿어지지 않는다.
병원에서 가장 공격적인 환자로 꼽혔던 최수천 할아버지. 이브의 부축을 받고 두 발로 일어선 최 할아버지는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울먹인다. 걷지 못하던 환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폭력적이던 환자를 온순하게 만든 이브 지네스트. 이것은 기적일까.
보고, 말하고, 만지고, 서게 하는 네가지 기본 축으로 이루어진 휴머니튜드.
인천 두 개의 시립요양병원에서 14명의 중증 치매 환자들을 대상으로 휴머니튜드 실험을 시작했다. 60일간의 추적 관찰! 두달 뒤 그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인간은 모두가 고유한 존재죠.
사람은 스스로의 독특함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한국의 병원들은 좋은 곳만은 아니네요. 변화가 시급합니다.
모든 치매 환자들이 우리와 더불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곳은 우리에게는 병원같지만 그들에게는 집입니다."
- 프랑스 치매 케어전문가 이브 지네스트
바라보고, 만져주는 것만으로 그들이 달라졌다
휴머니튜드 첫날, 두 곳의 병원에선 환자의 구속 띠부터 풀었다.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아 ‘외딴방 할머니’라고 불리는 장영숙 할머니. 휴머니튜드 기법대로 눈을 마주치고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걸자 할머니는 간호사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 또다시 이병섭 할머니의 소동이 시작됐다. 예전 같으면 신경안정제 주사로 진정시켰던 이 할머니. 하지만, 휴머니튜드 적용 이후, 김은숙 간호사는 할머니의 눈을 마주치고, 따뜻하게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효과는 놀라웠다.
순식간에 안정을 찾고 병실로 들어가는 할머니.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한 것일까.
"진정성있게 눈을 맞추면, 사람이 눈으로 얘기할 때 그 마음이 전해지잖아요.
지속적으로 계속 눈으로 하트를 날려드린 거죠.
진정 인간으로 대해주는 것, 인격적으로 본인을 대해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마음의 문을 연 것이 아닌가."
- 워크숍 참여 간호사
눈맞춤은 왜 중요한가
환자들의 놀라운 변화를 지켜본 간호사들은 이러한 변화가 눈맞춤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눈맞춤은 휴머니튜드 케어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기법.
일본 교토대에서는 눈맞춤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어떤 눈맞춤이 가장 효과적인지 밝히는 실험, 웨어러블 카메라를 착용하고 간호사들의 시선 각도와 거리를 측정한 결과,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환자와 소통을 잘하는 숙련된 간호사일수록 시선 거리는 25-30cm를 유지하고, 각도는 0도 즉 정면을 응시한다는 것. 비밀은 치매 환자들의 시야각에 있다. 정상인의 시야 범위가 120도인 것과 달리, 치매 환자는 시야각이 좁아져 이 범위 안에 들어와야 인지가 가능한 것이다.
누워만 있던 환자들이 걷기 시작했다
휴머니튜드를 적용한지 30일, 가장 놀라운 변화를 보인 환자는 최수천 할아버지였다.
늘 휠체어를 타고 생활했던 최 할아버지. 휴머니튜드 도입 20일만에 부축을 받아 걸어서 화장실에 갔고, 30일만에 아무런 보조 기구 없이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할아버지의 표정이었다. 늘 화를 내고, 간호사들을 물고 때렸던 최 할아버지가 웃으며 간호사들을 대하기 시작한 것. 가장 두려운 환자였던 최 할아버지는 이제 병원의 스타가 됐다.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던 14명의 치매 환자들은 휴머니튜드를 도입한 이후, 매일 일어서고, 걷기 연습에 매진했다. 걷게 되면서 세상 풍경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치매 환자들. 공격성은 놀랍게 줄었고, 환자들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졌다.
휴머니튜드의 네가지 축 중 하나인 ‘서기’. 서고 걷는 것은 왜 치매 환자들에게 중요한 것일까. 타케우치 교수는 걷고 활동하는 능력이 인지력을 향상시킨다고 발한다. 피츠버그대 연구에서도 하루 30-40분, 주 3회 걷기를 1년 지속한 노인 그룹은 전두피질과 해마 용적이 2% 증가했고, 걷지 않은 그룹에 비해 기억력, 주의력, 언어능력 테스트에서도 월등한 성적을 얻은 것으로 밝혀졌다. 걷는 것은 육체를 위한 운동만이 아닌 것이다.
"걷는 것은 인간에게 생활공간을 확대하는 유일한 기능입니다.
거동을 못하는 노인의 비극은 걸을 수 없어서, 자기 힘과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자신의 몸을 이동시킬 수 없는 것이죠.
이것이 거동을 못하는 노인의 비극입니다."
- 치매 전문가 타케우치 교수
휴머니튜드를 넘어 - 모든 치매 환자에겐 열쇠가 있다
환자들마다 변화의 속도는 달랐다. 휴머니튜드를 적용한지 40일이 넘었지만 이정례 할머니는 여전히 요지부동. 이정례 할머니는 늘 간호사들에게 화를 내고, 목욕 때마다 소동을 피우던 할머니다. 평생 가족만 돌보며 살았다는 이정례 할머니. 간호사들은 고민 끝에 할머니에게 새로운 돌봄의 대상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강아지 인형을 목욕시키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하자, 할머니는 놀랍도록 온순해진다. 목욕 내내 강아지 씻기는 일에 집중하는 할머니.
이 역시 휴머니튜드의 기본 철학과 다르지 않다. 환자를 인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알게 되며, 환자와 소통할 수 있는 열쇠를 찾게 되는 것이다.
"치매 환자의 삶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 사람이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립다고 생각하는 것,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열쇠가 됩니다."
- 치매 전문의사 오이겐 교수
60일 후의 변화 - 이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다
휴머니튜드 도전 60일 후. 변화의 크기와 속도에 차이가 있었지만, 14명의 환자 모두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14명의 환자중 5명의 환자들은 신경안정제 사용이 절반 이상 줄었다. 전혀 반응이 없던 환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던 할머니는 적극적으로 운동에 나선다. 화를 내던 환자가 웃게 되고, 누워있던 환자를 걷게 만든 휴머니튜드 케어법! 하지만 간호사들은 이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희 진심을 환자가 알아주는 것 같아요.
2개월밖에 안됐는데도 환자분이 이 사람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 좋은 사람, 이런게 기억에 박혔거든요."
- 워크숍 참여 간호사
"직원들이 기적이라고 해서 이건 기적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환자들이 좋아질 수 있다.
환자를 인간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다.
그래서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고."
- 워크숍 참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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