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든 그날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현 아이오이 다리 상공에서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했다. 섭씨 4,000℃에 달하는 열기와 초속 340m의 거센 폭풍이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며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인류사 최악의 살상무기 원자폭탄. <역사저널 그날> 에서 그날을 재현한다. 역사저널>
“살아있는 지옥을 봤습니다.”
즉사 약 7만 명, 투하 당일 하루 만에 약 10만 명이 사망하고 그 후유증으로 약 16만 명이 사망했다. 단일 무기 사상자 수로는 사상 최대. 원자폭탄의 위력은 상상초월이다. 하지만 원폭이 투하되고 무수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어도 일본 수뇌부의 각료 회의는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은 미국의 공격. 히로시마 원폭 투하 3일 후 미국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팻맨’을 투하했고, 약 4만~7만 명이 즉시 사망했다.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12월까지 총 13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패색이 짙었던 전쟁 말기, 연이은 원폭 공격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끝까지 버틴 이유는 무엇일까.
원자폭탄 개발, 아인슈타인이 관련되어 있다?
1939년,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신형 폭탄 한 개만으로 항구 전체와 그 주변을 파괴시킬 수 있다.” 나치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촉구했다. 미국은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견제하며 극비의 원폭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아인슈타인을 포함하여 나치의 탄압을 받아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그러던 중, 1945년 5월, 독일은 항복을 선언한다. 그러나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원폭 개발을 강행하는데... 과연 미국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세계에서 원폭 피해자가 두 번째로 많은 나라, 대한민국
히로시마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원폭 피해까지 입은 식민지 백성들. 하지만 이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구호를 받지 못했다. 일본은 치료 중에 조선인임이 드러나면 위압감을 주고, 심지어 치료를 중단하여 그대로 방치했다. 그 참상은 일본의 화가가 그린 한 폭의 그림 <까마귀> 에 잘 드러나 있다. 일본인 눈에 비친 지옥불 속 식민지 백성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까마귀>
우리나라 원폭 피해자의 60%는 경상남도 합천 출신이다. 한 마을이 통째로 히로시마로 건너갔다. 일본의 잦은 수탈을 못 이겨 돈을 벌기 위해 건너가거나, 강제 동원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폭 피해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2~3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원폭 피해. 그리고 일본의 외면. 류근 시인이 이들을 만나봤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현재 일본은 히로시마를 ‘평화의 상징’으로 활용하며 전쟁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원폭 돔’을 통해 인류 역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과연 피해는 왜 생겼고, 가해는 누구 책임인가? 망각이 아닌 기억으로 역사의 진실을 마주해야 세계 평화를 말할 수 있다. 철학하는 과학자 김상욱 교수, 한일관계 전문가 오일환 교수와 함께 <역사저널 그날> 에서 그 진실을 민낯을 만난다. 역사저널>
26일 화요일 밤 10시 KBS 1TV <역사저널 그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떨어진 날”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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