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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김근태 10주기 추모제’ “한국 땅에 자유와 민주주의 새기다”

29일, 마석 모란공원, 명동성당, 옛 향린교회 예배당에서
진보인사 총집결 생전 고인의 뜻과 의지 업적 기려
제6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본상에 ‘명필름’,특별상에 ‘김미숙 김용균 재단 이사장(故김용균 씨母)’ 선정

29일 남양주 모란공원에 있는 故김근태 의장의 묘역에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 등이 모인 가운데 서창훈 김근태 재단 부이사장(사진 가운데 마이크)이 생전 고인이 걸어온 길을 소개하며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9일 남양주 모란공원에 있는 故김근태 의장의 묘역에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 등이 모인 가운데 서창훈 김근태 재단 부이사장(사진 가운데 마이크)이 생전 고인이 걸어온 길을 소개하며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 어떤 위협 앞에서도 도덕적 자긍심을 잃지 않았고, 사람에 대한 연민이 누구보다도 크고 깊었던 아름다운 사람 김근태를 기억하자.”

우리나라 민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故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제10주기 추모행사가 29일 열렸다.

이번 행사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를 비롯해 생전 고인과 인연이 깊었던 민주진영 인사들이 총집결했다. 이들은 이날 생전 고인의 뜻과 의지를 기리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김근태 정신’이 더욱 각별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추모제는 (재)김근태의 평화와 상생을 위한 한반도 재단과 김근태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근태생각’이 함께 주관했다.

추모는 오전 10시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김근태 전 의장‘묘역참배’로 시작됐다.

이곳에선 이재명 후보가“불공정, 불평등에 맞서 2012년을 점령하라. 유언처럼 남긴 그 명령이 아직도 생생하다“라며 추모사를 했다.

이 후보는 “(김 전 의장은)국민의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을 정치의 이유로 삼았다. 또 국민이면 누구나 먹고 자고, 자식 키울 걱정을 없게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했다”라면서“따뜻한 나라 따뜻한 경제, 억강부약, 기본사회, 좌우 진영을 따지지 않는 실용주의가 그의 면모다”고 했다. 그러면서 “삶의 대척점에 선 박정희의 경제성장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셨다”고 덧붙였다.

김 전 의장의 딸 병민씨는 유족을 대표해 "여기 계시는 분들이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돼 2022년에 김근태가 원했던 세상의 방향으로 결정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김 전 의장의 10주기 보고는 서창훈 김근태 재단 부이사장이 맡았다. 서 부이사장은 생전 고인을 추억하면서 그가 걸어온 생애와 철학을 낭독했다.

서 부이사장은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희망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처럼 가시밭길을 걷는 그의 가슴엔 늘 ‘희망’이 자리했다”면서“2011년 몸이 부서지는 죽음 앞에서도 ‘참여하는 사람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고 참여를 독려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특권과 몰상식을 배격하는 민주주의와 서민정신을 전제로 비정규직, 시장만능주의, 복지사각지대, 불공정한 경쟁 등을 정치대오가 아닌 국민대오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1%가 99%를 지배하도록 정교하게 고안되고 발전돼 온 부당한 시스템에 저항해야한다”던 고인의 말과 행동을 기렸다.

그는 “김근태가 떠난지 1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그를 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싸워야 할 때 마지막까지 견뎌냈던 그가 더 선명하고 뚜렷해진다”며“삶의 전부가 온전히 민주주의 였던 김근태를 단지 추억하기보단 ‘김근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민주주의가 우리의 언어로 불려질 수 있었고, 우리 역사에 새길 수 있었다’고 선언하겠다”고 했다.

이후 오후 2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가진 추도미사는 김상우 신부, 유충희 신부, 이영우 신부, 함세웅 신부의 공동집전으로 진행됐다. 미사 후 2부 추모예식에는 김근태와 오랜 우정을 나누고 뜻을 함께해온 장사익 선생이 추모의 노래를 불렀다.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옛 향린교회 예배당에서는 제6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시상식과 추모문화제가 진행됐다. 제6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의 수상자는 본상에 '명필름(대표 이은, 심재명)', 특별상에 '김미숙 김용균 재단 이사장(故김용균 어머니)'이 선정됐다.

장영달 김근태재단 이사장은 “김근태 선생의 민주주의 길, 따뜻한 시장경제와 한반도 평화의 길은 그를 떠나보낸 10년 동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정치의 본분이며 길이었다”고 강조했다.

고인의 배우자인 인재근 의원은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남긴 말 중에 ‘함께 꿈을 꿉시다, 우리의 꿈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함께 도전합시다, 우리의 도전이 우리의 희망입니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고인의 생전 어록을 회고했다.

한편 지난 4일 개관한 서울 도봉구 소재의 ‘김근태기념도서관’에서는 민주주의자 故김근태선생의 10주기를 맞아 추모전이 열리고 있다. ‘가야 할 미래, 김근태’를 주제로 열린 이번 추모전은 2022년 1월 30일까지 진행된다.

한편 1947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故김근태 전 의장은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 그해 “노동자는 노동을 팔 뿐 그 자신을 파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신의 노트에 썼다. 이 말은 생전 고인의 휴머니즘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어록이다.

이후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기나긴 수배생활을 했고, 1990년까지 군사정부에 의해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는 정계활동을 했고, 2011년 12월 향년 64세로 선종했다.

 

민주주의자 故김근태 선생 연보

1947.2.14.

부천 소사에서 태어나다.

1965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입학하다.

1967.3.

서울대 상대 대의원회 회장으로 선출되다.

1967.9.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연행되다.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다.

1971

교련반대데모, 대통령선거파동으로 수배생활 시작하다.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배당하다.

1973

일신산업 수출부에 근무하다.

1974

긴급조치 9호로 연속 수배당하다. 김상진 서울 농대생의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 자결을 계기로 긴급조치가 발동되다. 이 때 서울대 5.22 사건과 명동성당 장례식 사건의 배후로 연루되어 1979년 박정희 저격사건 때까지 피신하다.

1976

먹고 살기 위해 공장에 들어가 일하기도 하고 기술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기로 하다. 이 때 여러 개의 자격증을 따다.

1978

인재근씨와 결혼하다. 수배 중에 가까운 가족만 모시고 간소하게 식을 치르다. 이후 1980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다.

1979

첫째 병준이 태어나다. 박정희 사망 및 긴급조치 9호 해제로 자유의 몸이 되다.

1982

둘째 병민이 태어나다.

1983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초대의장으로 선출되다. 투쟁성의 회복과 청년역량의 체계화, 운동세력 간 연대, 대중운동 지원 등의 과제를 천명하고, 이듬해에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창간하다.

1985.9.4.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배후로 조작되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구속되다. 그로부터 22일이 지난 9월 26일 오후 2시 30분, 검찰청에서 엘리베이터로 호송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인재근씨가 가까스로 남편과의 대면에 성공하다. 다음날,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살인적인 고문 수사가 폭로되다.

1985.12.19.

김근태 의장의 첫 공판에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고문사실을 폭로하다.이 공판에서 우리나라 법정 사상 최초로 모두진술 제도를 활용하다.

1986.7

국가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받다.

1987

수감 중에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 씨와 공동으로 수상하다. 이듬해인 1988년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이 김근태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다.

1988.12.15.

서울고법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28일 만에 이근안 전 경감을 수배하다.

1989.1.21.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창설에 참여하여 정책실장, 3월에 집행위원장에 선임되다.

1990.5.9.

민자당 반대 시위 및 전민련 결성과 관련하여 구속,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다.

1991.5.

미국 하원의원 17명이 김근태의 구속수감에 대하여 한국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오다.12월에 같은 일로 미국 하원의원 44명이 한국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오다.

1992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집행위원장이 되다.

1994

통일시대민주주의 국민회의를 창립하여 공동대표가 되다.

1995.2.

민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로 선임되다. 이어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선임되다.

1996

서울 도봉(갑)에서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다. 이후 16대,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다.

2000.8.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되다.

2003.10.27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되다. 국회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 구성을 제안하고, 정치개혁입법을 이끌다. 이듬해 2004년 총선에서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전국을 누비다.

2004.7.1.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에 취임하다.

2006.6.10.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취임하다.

2006.10.20.

개성공단사업과 금강산 관광사업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돼야 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명확하게 알리기 위해 개성공단을 방문하다.

2007.3.27.

한미 FTA 협상결과가 또 다른 저성장과 더욱 심각한 양극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국민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협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시작하다. 이어서 30일에는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재차 협상 중단을 촉구하다.

2007.6.12.

평화개혁세력 대통합의 밀알이 되겠다는 성명과 함께 대선불출마를 선언하다.

2008.9.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초빙교수로 한국정치학을 강의하다. 2010년까지 한양대에서 강의하고, 2011년에는 우석대에서 석좌교수로 강의하다.

2008.10.

민주연대 발기인대회에서 이명박 정부를 향해 민간독재라고 외치다. 이해 겨울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비롯하여, 2011년 타계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투쟁현장에 함께 하다.

2011.12.30.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과 파킨스병,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타계하다.

2012.1.3.

마석 모란공원에 영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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