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90년전인 1910년 8월 29일은 우리나라와 민족이 왜적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당했던 국치(國恥)일이다. 왜적은 온갖 교활한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나라를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면서도 국제적인 여론을 의식하여 형식상으로는 각종 합의서를 만들어 시행하는 척했다. 이를테면 1876년 함포로 우리를 위협하여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1900년에는 친일파인 이완용(李完用)등을 앞세워 온 국민이 원하는 것처럼 꾸며서 을사보호(乙巳保護)조약을 체결한 것 등이다.
왜적들이 우리나라 곳곳을 종횡하면서 만행을 자행하자 민비(閔妃)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왜적은 목적달성에 민비를 걸림돌로 생각하여 시해하기로 작심하고 미우라(三浦梧樓)를 공사로 임명하여 서울에 파견했었다. 미우라는 우리나라의 친일깡패와 자국인 다수로 혼성부대를 조직하여 경복궁을 습격케 하되 ‘대원군이 민비와 정쟁을 일으켜 훈련대원을 이끌고 왕궁에 침입하여 민비를 시해하고 정권을 탈취하였다’는 설을 퍼뜨렸다. 그 흉행에 관한 자국의 죄책을 모면하기 위하여 1895년 8월 1일 서울 마포 아소정(我笑亭)에서 대원군을 협박하여 앞세우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곤영전(坤寧殿)에서 민비를 참하고, 그 앞 마당에서 장작과 석유로 시신을 소각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유골을 경회루(慶會樓)연못에 투척했다.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이토오를 사살한지 1개월이 지난 12월 2일에 평남(平南)출신으로 23세의 이재명(李在明)이 서울 명동에서 이완용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대한 제국을 합병방침을 세운 왜정은 1910년 5월 30일 육군 대장 데라우찌(寺內正毅)를 서울에 파견하자 부임즉시 대한민보(大韓民報)의 발행을 정지시키고, 자국 헌병 2천명을 증원하여 요소마다 배치하고 항일투사들의 동향은 물론 사생활까지도 감시하며, 또한 식자와 유지들의 동정도 일일이 살폈다. 데라우찌는 완치된 이완용과 조중응(趙重應)을 다시 불러들여 한·일 합병에 관한 구체안을 작성하여 8월 18일 주구(走狗)내각의 승인을 받았다.
8월 22일부터는 경비가 더욱 삼엄하여 한국인이라면 두사람만 모여 있어도 심문하고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발로 차고 옷을 찢는 등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할 행동을 서슴없이 하였다.
융희황제(隆熙皇帝)의 최종 어전회의를 열고 소위 한·일 병합이라는 안건을 결의하여 이완용과 데라우찌 두사람의 명의로 한·일 병합조약에 서명 날인한 날이 바로 내일로 졸수(卒壽)를 맞는다. 우리는 왜인에게 한두번 속은 것이 아니다. 지금도 그들은 정국 신사를 신봉하는 광적 정객도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양복규 명예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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