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지 못하면 울부짖고 싶고 아무거나 때려 부수고 싶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터질 듯한 가슴의 응어리들을 그림으로 쏟았어요. 지금은 내 자신이 귀먹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때가 있어요. 귀가 들렸다면 오늘의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일곱살때 후천성 농아가 됐지만 넘치는 정열과 예술적 투혼으로 이를 극복하고 한국회화의 대가로 우뚝선 운보 김기창 화백이 별세했다.
왕성한 실험정신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변신을 거듭한 한국화단의 거목. 그는 타고난 예술혼과 활화산같은 창작열로 주목받았으며 청각장애로 인한 침묵의 고통을 딛고 우뚝선 의지의 인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파란만장하고 자유분방한 삶 만큼이나 말과 행동도 기상천외했다. 유가족이 빨간 목도리와 모자 차림의 영정을 쓰기로 한 것도 불우함을 해학으로 넘겨나간 그의 기인다운 평소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1914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운보는 유년기부터 순탄하지 않은 삶을 보냈다. 아버지가 금광사업에 실패해 가세가 기울고 일곱살 되던 해엔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영원히 청력을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들을 수 없는 운보를 처음으로 세상과 만나게 해준 사람이었다. 직접 한글을 가르친 것도 어머니였고, 목수를 시키면 평생 밥은 벌어먹을 수 있다는 아버지의 주장을 묵살하고 일제 당시 큰 화가였던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로 데려간 것도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운보가 열일곱살 되던 해 세상을 뜨고, 그는 한평생 ‘영원한 모성’을 그리워하며 살게 된다.
이당에게 그림을 배운 지 6개월만에 운보는 1931년 선전에 ‘판상도무(板上跳舞)’라는 널뛰기 소재의 작품으로 입선해 일찍부터 대가의 소질을 보였다. 1946년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 그의 삶과 예술에 일대 전기가 마련됐다. 한국전쟁 당시 그는 피난지 군산에서 조선시대 한국인의 모습으로 예수의 일대기를 그린 ‘성화’ 연작을 2년에 걸쳐 제작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전통 한국화의 평면구성에서 탈피해 입체 구성의 ‘노점’, ‘구멍가게’등 대표작을 제작, 입체파 선두로 나서게 된다. 60년대 들어 해외 화단에 나선 운보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가장 뚜렷한 변화를 보이는 추상작품 ‘태고의 이미지’, ‘청자의 이미지’ 등 이미지 연작으로 한국화의 새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의 삶과 작품세계의 변화는 이당을 처음 만난 30년, 현대적 동양화를 실험하기 시작한 52년, ‘바보그림(바보산수·바보화조)’으로 나아간 75년 등 세번의 전환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두 번째 전환점은 많은 결실을 맺었다. 원근·음영을 무시하고 담백한 직선으로 인물과 풍경을 표현한 ‘복덕방’ ‘풍경’ ‘군밤장수’를 비롯해 예수를 갓 쓰고 도포 입은 한국인으로 바꿔 그린 ‘성화’ 연작 30여점, 후일 ‘점·선’ 연작의 모태가 된 ‘문자도’ 역시 이때 그려졌다.
그러나 수차례 부부전을 가진 화업의 친구이자 인생의 반려인 부인이 1976년에 타계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허탈에 빠졌다. 아내를 기려 성북동에 운향미술관을 세운 그는 성화집 ‘예수의 생애’발간을 기념해 예수생애 연작으로 ‘운보 김기창 성화전’을 가졌고, 대걸레로 작업한 ‘심상’ 연작을 내놓기도 했다.
88올림픽 때 기념우표와 아트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던 운보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쉬지 않고 작품을 쏟아 냈다. ‘붓을 움직일 힘이 있는 한 그림을 그린다’는 그의 말처럼 90년대 중반까지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미공개 작품전’등을 열었으며 지난해에는 갤러리현대 등에서 미수기념전이 개최돼 병상의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감격을 안겼다.
그는 지난 96년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뇌출혈 증세를 보이며 더이상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연말 제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는 월북했던 동생 기만씨(72·공훈화가)를 극적으로 만나 가슴아픈 가족사와 민족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예술가적 이미지를 고루 갖추고 그 전형을 보여준 그의 삶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 그런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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