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가 지워준 가장 큰 화두는 "변화"이다. 그 변화라는 것의 주체는 인간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부분의 개인과 단위조직들은 그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보편적인 인간이 지향하는 삶이라는 것은 스물 몇에 취직을 하고 몇 단계의 승진을 거쳐 쉰 넘어에 퇴직을 하거나, 라이프사이클이 만만한 사업을 대충 운영하며 생활을 영위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향후 인간의 삶에는 정형화된 미래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미국 포츈지에서는 98년 표지에 이미 직장인의 정년을 40세로 규정한 바 있다. 경기가 침체되어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노동이 더 이상 중요한 생산요소가 아닌 사회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과 소비 및 구매패턴의 급속한 변화가 기존의 질서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 원가의 85%를 자본가와 노동자가 투입하였고 이익금의 분배에도 역시 그만큼의 비율이었다. 현재 그 두 집단에 돌아가는 몫은 60% 미만이다. 나머지는 기획, 설계 및 디자인, 금융, 광고, 판매자 등 소위 진화된 전문가 집단에게 돌아간다.
반도체의 경우 원가의 85% 이상이 전문화된 설계 및 엔지니어 그리고 특허권자에게 분배된다. 필자가 근무하는 회사의 경우 연간 1000억원 이상을 전산투자에 쏟아 붓는다. 이전 같으면 그 돈은 고스란히 직원과 주주에게 돌아갈 몫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가졌던 노동의 영역과 노동을 통하여 얻어왔던 대가는 축소될 것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말이다. 향후 30년 내에 세계 전체의 재화를 생산하는데 현재 노동력의 2%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보고서가 그저 가정일 것만 같지는 않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내 직장과 사업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변화에의 요구가 절실한 것이다. 전문성의 확보, 그리고 자신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노력 그리고 내 관념의 수준을 훌쩍 추월해버린 신인류의 의식을 반에 반이라도 따라가야 한다. 그러면 넘볼 수 없는 내 영역이 자연스럽게 구축된다.
비단 변화의 요구는 당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십수년동안 막대한 교육비를 쏟아 붓고 눈물겨운 학업을 마치고도 일할 자리가 없는 현실에서, 게임만 잘해도 직업이 보장되는 사례를 보면 경제적 가치가 어떻게 이양되는가를 잘 말해준다. 생계를 위해서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을 해야하는 사회에서, 하고 싶은 일만 열심히 해도 제도권의 우등생보다 월등해질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변화는 이제 사회적 당위성을 넘어 교육적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변화는 굳이 이러한 한 개인의 진보적 관점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관존민비적 사고가 남아있는 공공기관이라면, 고객의 눈이 아닌 기업이익의 잣대로 경영하는 기업이 있다면 조직의 사활을 걸고 변화관리를 해야 한다. 당연히 변화에는 저항이 따른다. 변화 이전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혜택이 사라질 변화에 동조할 리 만무하며, 변화에 동조하는 입장에서도 변화를 수용하는 입장에서도 불확실한 미래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적극적이진 못할 것이다. 즉, 저항은 극렬하지만 동조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현직에서 변화를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주도적 역할을 해야할 구성원들이 필요성에 동의하면서도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하다. 農道에서, 천혜의 자연조건에서 적당히 무뎌지고 현실에 안주하는 타성이 본능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것 같다. 익숙해진 사이클에서 탈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실감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변화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존의 문제이다. 개인이 그렇고 공공기관은 포함한 모든 기업이 그래야 한다. 변화만이 가난한 살림과 낙후된 지역을 탈피하는 미래를 제시할 수 있다. (대우증권 서신동지점장 엄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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