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미술관 인구의 상대적 빈곤이 거론되고 있다.
미술관도 영화관처럼 문화공간이다. 그러나 영화관이 안방에서 편히 T.V를 즐기던 천만 명을 끌어내는 반면, 미술관은 지나가는 발길조차 붙들지 못한다. 무슨 차이인가.
구미에서는 미술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을 종종 볼 수 있다. 7, 8년 전 워싱턴 D.C. 국립박물관에서의 베르미어 기획전 당시, 미주 각지와 유럽, 일본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매일 한정된 수의 티켓을 구하고자 겨울추위에 새벽부터 수백 미터씩 늘어섰던 광경은 특히 잊을 수 없다. 줄의 길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국내 미술관 인구의 희소를 구미와의 수준차이로 돌리는 것은 얄팍한 변명이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화공간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국내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는 말도 있다. 구미미술계가 일컫는 '미술관의 종말' 위기가 닥친 것이다.
18세기말 특권층의 향유물인 미술작품을 다수와 공유하기 위해 시작된 미술관은 내내 교육과 계몽의 역할을 담당했다. 20세기 모더니즘 시대에 '미술을 위한 미술'의 주창으로 미술관이 성역화되고, 신성한 순수미술과 대중의 대화단절 탓에 '공중을 위한 미술관'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포스트 모던시대의 도래와 함께 순수미술과 대중미술, 고급과 저급미술, 주류와 주변문화의 경계와해로, 구미의 미술관은 대중화와 세속화를 지향한다. 시민문화·레저공간 기능의 미술관은 상업성·흥행성·오락성을 띈 문화산업의 장이 된다. 국립미술관들조차 인맥이 넓은 소위 '귀족(blue blood)' 출신이나 MBA 소지자를 관장으로 선정하고, 자금조성을 위한 후원자 형성과 마케팅 능력을 중시하게 되었다. 국민세금과 입장료만으로는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시관련업무는 학예관과 큐레이터의 몫이다.
우리의 미술관은 상당수가 1960년대의 타임캡슐에 갇혀있는 듯 하다. 여전히 순수미술의 성역고수에 힘쓴다. 이는 '보통사람들'을 다른 레저문화에 양보하는 결과를 나았다. 무엇을 위한, 누구의 미술관인가. 문화선도의 기능은 사람들이 찾아줘야만 가능하다. 디즈니랜드의 재미, 영화관의 스펙타클, 마켓의 소비문화를 미술관에 절묘한 비율로 도입하는 것 역시 역설적이지만 순수미술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방법이다. 구미의 미술관처럼 대중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순수미술전시와 더불어 예술영화, 공연, 광고, 만화, 사진, 문화상품, 패션, 지역시민, 기획행사, 교육프로그램 등을 활용한 '판'을 벌려도 좋다. 외면하는 대중을 탓할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조은영 (원광대 순수미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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