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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외도]유백영씨, "관객과 하나된 무대 이미지로 담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문화예술인들이 많다. 전업작가 선언의 그 날. 그러나 그 꿈은 대개 허무하다. 이 땅에서 ‘예술’과 ‘문화’의 영역만으로 사는 일은 너무 팍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은 전혀 별개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외도(外道)다. 그러나 이들의 외도는 아름답다.

 

소설가 이병천씨의 직업은 방송국 프로듀서, 이봉명 시인은 양봉업을 한다. 화가 정진흔씨는 사과농장을 운영하고, 화가 이주리씨는 카페를 운영한다. 자신의 분야를 또다른 활동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이들도 있다. 명인·명창들은 ‘산공부’를 넘어 강단에서 제자들을 만나고, 곽병창·김정수·홍석찬·오진욱·정진권·김안나·임정룡씨 같은 연극인들은 방송인으로 활동하면서 끼를 발휘한다.

 

전주독립영화협회장이자 중학교 교사인 조시돈씨나 대중가요 음반을 꾸준히 발표한 전북대 공대 김종교 교수 같은 이는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꿈을 실현하는 경우다. 두갈래 길을 가는 이들에게 본업은 따로 있지 않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꿈, 그리고 또다른 미래의 꿈을 위해 자신을 새롭게 투자하는 사람들. 그들의 아름다운 외도에 동행하는 일은 즐겁다.

 

[아름다운 외도](1) 아름다운 외도 법무사이자 사진작가인 유백영씨

 

지난 4월 동초제 심청가로 완창발표회를 연 송재영의 소리를 듣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고된 연습으로 굳은살이 배긴 목을 뚫고나오는 소리가 그의 가슴을 울렸다고 했다. 감성적이고 여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법원에서 20년 동안 사나움만 피우고 살았다”는 그에게는 날카롭고 꼼꼼한 면이 동시에 존재했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첫 공연부터 절정의 순간을 기록해 온 사진작가 유백영씨(50). 사각 프레임을 벗어나면 그는 법무사가 되고, 네모난 사무실을 벗어나면 그는 사진작가가 된다. 어느 한 쪽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이중생활(?)이다.

 

“저 사진 엄청 좋아해요. 사진도 직업 못지않게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요.”

 

법원에서 근무했던 그는 3년 전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개인 사무실을 냈다. 사진에 더 많은 시간을 내고 싶어서다. 그에게 사진과 법무는 상호보완적이다.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에서 사진은 휴식과도 같고, 법원에서 기른 사람보는 눈은 사진을 찍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가 사진을 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1995년 남북사진작가공동사진전 대표로 뽑혔고, 지난 2000년에는 ‘얼음’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사실적인 사진들 속에서 추상적인 그의 작품을 두고 ‘독특하다’ ‘이상하다’ 등 의견이 분분했다. “다른 사람들이 찍으면 찍지 않겠다”는 평소 고집이 자신의 색깔로 확실하게 묻어났다.

 

“교과서적인 사진은 재미가 없어요. 창작은 어차피 혼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사진도 혼자 찍으러 다녔지요. 대상을 축소하고 집중시켜 ‘내 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까다롭게 촬영 대상을 선택하는 그는 화려한 것보다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봉오리를 맺고있는 연꽃을 보면 ‘애기연이 엄마한테 기대고 있구나’하고, 폐교에 버려진 슬리퍼에서도 ‘그래, 나 너 좋아해’라는 따뜻한 이야기를 찾아낸다.

 

“자연을 오래 찍다보니 새로운 소재를 찾고 싶었어요. 마침 소리전당이 개관을 했고, 운이 좋아 다양한 공연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죠.”

 

처음 공연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때는 무대 전체가 나오도록 무조건 크게만 찍었다. ‘공연에 방해되지 않을까’하는 걱정 때문에 좋은 장면에서도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머리 속으로만 사진을 찍을 때도 많았다. 공연을 보는 눈은 덤으로 따라왔다.

 

“이젠 저 사람이 공연에 몰입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느껴져요. 공연을 하는 사람과 정신적 교감을 이루지 못하면 몇 백 컷을 찍고서도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거든요.”

 

지난달 열렸던 ‘장사익 소리판’은 리허설부터 공연을 봐도 감이 안오는 경우였다. 본 공연 중반 ‘찔레꽃’을 부르며 서서히 양 팔을 들어올릴 때, 그는 몸과 마음으로 소리를 받아들이는 장사익을 포착했다. 기막힌 순간이었다.

 

동남풍 조상훈의 무대에서는 관객들을 음악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느꼈고, 지난해 만난 홍신자의 춤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공연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무대 뒷쪽에서 지휘자의 손짓과 표정을 보며 음악을 익혔고, 낯선 곡은 미리 들어보고 가는 수고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진기가 만능인 줄 알았어요. 사진이 좋지 않으면 카메라 탓을 했는데, 더 좋은 카메라를 샀는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죠. 사진기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의 만분의 일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제 그는 ‘사진기는 멍텅구리’라고 말한다. 사진기가 아닌, 사진을 찍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했다.

 

“20년만 부지런히 찍으면 우리나라 예술인들은 다 내 시야를 거치게 되겠죠. 사진도 적게는 30년 정도 숙성이 필요해요. 내가 죽고나서 1백년 정도 지나고나면 사진들은 소리전당 역사가 되겠죠.”

 

지난해 그가 촬영한 소리전당 공연만 해도 2백30여개.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이라도 관련 신문기사와 공연 내용, 팜플렛과 함께 필름을 보관해 뒀다.

 

지금까지는 공연사진의 특성을 익히기 위한 연습이었다. 5년 후면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는 그는 빠짐없이 눈으로 문화를 기록해 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한 장의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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