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말 안 하고는 살 수 없는 게 인간인지라, 인간을 언어적 동물이라 말들 합니다만, 요즘 같으면 살다 살다 말 좀 안 하고 안 듣고 사는 날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은 존재의 본질을 포착하는 도구요, 말을 통해서 인간은 진실을 주고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로써 말의 진실을 가리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이 먼저인지 사람살이의 진실이 먼저인지 앞뒤 분간도 없이 살아가는 나날들이 기실 너무도 끔찍해서 그렇습니다.
평화와 재건을 위해 총 든 군대를 보낸다는 말은 얼핏 듣기에 아무런 논리적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만, 그 말의 문맥을 살펴 따지고 들어가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억설(臆說)입니다. 말이 놓여 있는 상황을 중시한 話用論(pragmatics)적 관점으로 보면 이건 이미 非文입니다. 非文은 진실을 담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평화와 재건을 위한다면 마땅히 의료와 건설 장비를 앞세운 민간 인력들이 찾아가야 합니다. 그 길만이 죽음을 무릅쓰고 도탄에 빠진 이들을 도와주러 가는 '평화 재건'의 숭고한 행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군과 적군도 제대로 분간 안 되는 진흙탕 싸움터에 또 한 무더기의 무장 세력을 보내는 일에 불과한 일을 저지르면서도 입으로는 평화와 재건을 외쳐야 하는 그 자가당착이 무섭습니다. 그러고도 그 자가당착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리는 이들의 내면은 얼마나 스산한지요. 그 나라 사람들과 오랜 교분 쌓아가면서 어렵게 어렵게 기업 꾸려 살고 있던 이들을 야밤에 빚쟁이 도망시키듯 다 철수시키면서도, 멀쩡한 청년 생목숨을 느닷없이 바쳐 가면서도, 여전히 '경제와 안보'를 부르짖고 있는 정황은 꼭 어설픈 희비극의 한 장면만 같습니다.
우리 시대의 말은 그렇게 참으로 못 할 짓을 많이 하면서 여전히 사람살이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축제하는 일도 마찬가지여서, 말을 위한 말, 단어를 위한 단어들이 아무런 여과 없이 날것으로 떠돌기도 합니다. 그 중 하나로 주민 참여형 축제와 문화 관광형 축제라는 이름 사이의 논란이 있습니다. 소리축제를 두고도 어떤 이들은, 지역주민들이 먼저 주체가 되어 축제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며 마땅히 주민 참여형 축제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들은, 축제를 통해서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꾀해야 하므로 관광 수익의 획기적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확실한 문화 관광형 축제를 지향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리고는 서로 논리의 서슬을 퍼렇게 세워서 상대를 제압하려다 보니, 정작 자신이 하는 말의 맥락도 본질도 종적이 묘연해지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물러나서 들여다보면,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축제의 주인은 해당지역의 주민(habitant)입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나서서 쌀 한 줌, 초 한 자루라도 보태어 축제를 만들고, 무대의 위든 아래든 제각기의 신명을 돋우어 즐기면 그게 이미 축제인 것입니다. 관광객은 누구인가요. 바로 축제를 보러 오는 손님들입니다. 이 손님들은 건물이나 풍경 또는 한두 편의 공연만을 보러 오지 않습니다. 주인을 보러 오는 겁니다. 주인들이 축제를 통해 즐기고 교감하고 반성하는 그 집단 문화의 현장을 보러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주인된 이들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일 그게 이른바 문화관광의 본질입니다. 그런 판에 주민참여와 문화관광을 마치 양립적인 개념으로 놓고 둘 중 어느 곳에 더 비중을 두느냐를 다투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행위입니다. 이 또한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말에 대한 모독인 것이지요.
온갖 말들이 현란하게 나부끼는 시대에 진실한 말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몇 자 적었습니다.
/곽병창(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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