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북면(遠北面) 감율동(甘栗洞)의 동임(洞任)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해당 군수에게 첩정(牒呈)을 올렸다. 첩정은 면임(面任: 면의 책임자)이나 동임(洞任: 마을의 책임자)이 군수에게 어떤 사안을 보고할 때 작성하는 것이다. 당시 감율동 동임의 주장에 따르면, 이규엽(李奎燁)이라는 사람이 감율동에서 살다가 어현동(於峴洞)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면 이규엽의 호(戶)에 부과된 세금도 마땅히 어현동에 부과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계속해서 감율동에 부과된 것이다. 이에 감율동 동임이 이규엽의 세금을 어현동에 부과해야 된다고 군수에게 첩정을 보냈던 것이다. 이에대해 관에서 이규엽의 호에 부과된 세금을 어현동으로 옮기라고 했다.
조선후기 세금 납부의 단위는 각각의 호(戶)나 개인이 아니라 마을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세금을 마을에서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인데 이를 공동납(共同納)이라 불렀다. 그래서 동임은 마을에 할당된 세금을 거두어 관에 납부하였다. 위에서 감율동의 동임이 군수에게 첩정을 보내 이규엽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바로 세금 징수의 단위가 마을이며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사회혼란을 표현할 때 흔히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이라고 한다. 여기서 삼정(三政)이란 토지의 면적에 따라 부과하는 전정(田政), 군역으로 호구별로 부과하는 군정(軍政), 빈민구휼제도가 조세처럼 되어 버린 환곡(還穀)을 말한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은 조선후기 일반 백성들의 삶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803년 강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나은지 사흘만에 군보(軍保)에 편입되고 이정(里正)이 못 받친 군포(軍布) 대신 소를 빼앗아 가니 그 백성이 칼을 뽑아 자기의 물건을 베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것 때문에 자식을 낳으면 곤액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 아내가 남편의 물건을 가지고 관문에 나아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졌다.’ 당시 백성들이 세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보다 더 크게 백성들의 삶을 위협한 것은 바로 잡역세(雜役稅)였다. 조선시대 세금징수의 직접적 책임자는 각 고을의 수령이었다. 국가는 각각의 군현에 세금을 할당하고 수령은 이에 맞춰 세금을 거둬들였다. 수령들은 할당된 액수를 채우기 위해 온갖 명목의 이른바 잡역세를 부과하여 부족한 할당량을 채웠다.
이러한 잡역세는 향촌조직을 통해 공동납의 형태로 이뤄졌다. 즉 유교신분적인 향촌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향약(鄕約), 기층민중들의 생활조직인 촌계(村契), 금송(禁松)을 목적으로 한 송계(松契), 잡역세 마련을 위해 조직된 보민계(補民契) 등을 통해 이뤄졌다. 이러한 잡역세의 공동납으로 농민에 대한 수탈이 강화된 반면, 세력가나 부농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조세부담에서 빠져나가 결과적으로 조선후기 농민들의 삶이 더욱 더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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