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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삼양설탕과 아버지 - 남형두

남형두(연세대 법대 교수·변호사)

요즘 핸드폰에는 음성인식 기능이 있다. 핸드폰을 열고 미리 입력된 이름을 발음하면 전화번호가 뜨고 통화버튼을 누르면 전화가 걸리는 기능이다. 그런데 기침을 몇 번 한 후 목소리를 가다듬고 똑똑히 발음해도 주변 소음 때문에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혹 삼사십년 전에 이미 이런 기능을 가진 전화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지금은 “0”번에 자물통을 채운 다이얼식 전화기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보다 더 골동품은 공전식 전화기다. 수화기를 들기만 하면 전화국 교환수가 안녕하세요 하면서 어디 연결해 드릴 건지 물어본다. 발음이 시원치 않아도 심지어 정확한 이름을 몰라도 대개 교환수들은 척척 알아듣고 신기하게 잘도 연결해 준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아버지는 자식들과 함께 백여 포가 넘는 3킬로그램 들이 삼양설탕을 선물종이로 포장하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요새로 치면 백화점택배 같은 것이다.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군청, 경찰서 등 관공서에 감사의 뜻으로 돌렸을 것이다. 그밖에도 아버지는 선생님과 지인들에게 돌릴 설탕을 아들과 딸들이 직접 전달하게 하셨다. 그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앞서 말한 전화교환수들이다. 1년 내내 고생한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아버지는 설탕 한 포에 담아 돌리셨던 것이다.

 

발이 페달 끝까지 닿지 않는 육중한 짐자전거에 설탕 십여 포를 싣고 가다, 그땐 겨울이 지금과 달리 길고 응달진 곳은 내린 눈이 녹지 않아, 가로등도 없는 어둑한 골목길에서 기우뚱거리다 넘어지기를 반복한 끝에 다 돌리고 집에 올 때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자식들에겐 팥죽에 설탕도 한 숟갈 넘게는 못 넣게 하시면서 남들한테는 포대 채로 돌리시다니. 어떨 때는 반항심으로 설탕을 몽땅 한곳에 버리고 오고 싶을 때도 있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전화교환수들에게 설탕 안 돌리면 전화 안 바꿔주나 하는 마음에 아버지를 원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똑 같이 설탕 한 숟갈 씩 넣었는데도 아이들 그릇에 담긴 팥죽은 내 것보다 항상 달다. 잠시 한 눈 판 사이 그새 두어 숟갈 씩 더 넣었겠지. 애비도 옛날에 그랬으니까.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가지런히 잘라 설탕을 듬뿍 뿌리고, 샘에서 막 퍼올린 시원한 냉수 한 사발에 설탕 한 숟갈 넣고 휘 저어, 한 여름날 러닝셔츠 차림의 지금 내 나이 쯤 되었을 흑백 사진 속의 아버지께 올려 드리고 싶다.

 

설을 앞두고 칠산어장에서 잡아 올린 게로 만든 곰소 꽃게장을 몇몇 분들께 보낼 주문을 하면서 우리 먹을 것을 빼다가 사진 속의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란다.

 

/남형두(연세대 법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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