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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떠나요] 진주 남강에 진 충절의 꽃

의암 주논개는

충절과 의기의 대명사로 알려진 주논개(朱論介)는 갑술년(1574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란 4갑술의 특이한 사주를 타고났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숙부 집에 어머니와 함께 몸을 의탁한 논개는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숙부가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보내는 대가로 논 세마지기와 엽전 삼백냥, 당백포 세필을 받고 달아나자 외가댁으로 피신했지만 장수관아에 붙잡혀 심문을 받게됐다.

 

당시 장수현감였던 최경회의 심리로 무죄판결을 받은 모녀는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자 침방관비를 자청,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됐다.

 

이후 논개는 병수발을 하던 최경회의 부인이 세상을 뜨자 17세때 최경회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도 잠시 뿐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돼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던 최경회가 불가항력으로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한 것.

 

복수를 결심한 논개는 승전 축하잔치를 벌이던 왜군들 틈에 기생으로 변장해 들어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촉석루 절벽아래 바위로 유인해 껴안은 채 남강으로 투신, 순국했다. 꽃다운 나이 20살때였다.

 

하지만 논개는 임진왜란때 충신과 효자, 열녀를 기술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보수적인 사대부들이 논개가 관기라고 트집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개가 관기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이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진주성 전투때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당시 상황이 잘못 전달돼 관기로 와전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논개의 의로운 기개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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