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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떠나요] ⑩진안 운교마을 '매사냥터'

"끼익 끼끼익" 매 울음소리에 선조들의 魂 다시 깨어나다

매사냥으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전영태 옹. ([email protected])

입동(8일)이 지났으니 이제 겨울이 시작된 셈이다. 11월 중순 이후에는 찬 바람이 드세어지면서 모든 생명체들이 겨우살이 준비에 들어간다. 우리네 조상들의 겨우살이는 굶지않고 따뜻하게 지내는 일이 일차적인 과제였겠지만,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자연과 더불어 활력넘치게 한 겨울을 나는 재치가 있었으니 한민족 최고의 겨울 스포츠 '매사냥'이 그것이다. 자랑스럽게도 매사냥은 산세가 아름다운 전라북도 지역에서 성행했고 아직도 진안에 그 맥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어지고 있다. 조상들의 슬기로운 겨울맞이를 되돌아보는 뜻에서 매사냥을 몇 회에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주.

 

 

겨울철에 접어들면 사람이나 모든 동식물은 움츠러든다. 생명체에겐 추위라는 게 더위보다 훨씬 혹독한 자연현상이어서 추위를 몰고오는 겨울은 동식물들에게 있어서 살아 넘느냐 죽느냐, 목숨을 건 사투의 기간이다. 사람들은 요즘 따뜻한 옷과 기름진 음식, 그리고 난방장치가 잘 된 건물에서 살게 되었기에 겨울의 혹독함을 잘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나 시골에서 재래식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겨울 추위의 삭막함을 잘 안다.

 

이 춥고 황당한 겨울을 즐겁게 나는 방법은 없을까? 예전 조상들은 '살맛나는 겨울나기'에 유감없이 지혜를 발휘했으니, 전라북도 진안 지방에서 유행했던 매사냥은 그 가운에서도 압권이다.

 

"애기야!---”

 

"매 나간다--!”

 

해마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운교리 마을 산자락, 마이산을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눈세상에서 사람과 매, 그리고 꿩이 뒤엉켜 죽자살자 한 판을 벌인다. 이곳이 바로 서구화 산업화에 밀려 하마터면 사라질 뻔 했던 우리의 귀중한 민속-매사냥이 살아 있는 현장이다.

 

매사냥은 야생 매를 받아 길들여서 꿩을 잡아 오도록 하는 겨울철 전통 사냥의 일종이다. 들짐승을 길들여서 들짐승을 잡아 오도록 하는 일이니 얼마나 사람의 공력이 들어가는 일이겠는가. 그래서 매사냥이야 말로 사람과 자연이 혼연일체가 되어, 사람이 자연으로 자연을 제압하는 '신토불이 자연 스츠'라고 할 만 하다. 이 매사냥이 옛날에는 겨울철 청소년의 주색잡기를 막기 위한 건전 오락으로 권장되었다고 하니 그가치를 알 만 하다.

 

또 성인들 사이에서는 '1응, 2마, 3첩'(한량들의 즐거움 거리로 매사냥이 으뜸, 말타기가 그 다음, 첩을 두는 일이 세 번째라는 뜻)라고 해서 매사냥을 호걸 한량들의 겨울철 레포츠로서 최고로 쳤다. 그래서 좋은 사냥매 한 마리가 좋은 말 한 필과 맞먹는 가격이었다고 한다. 요즘 시세로 치면 사냥매 한 마리가 승용차 에쿠우스나 렉서스 한 대와 맞먹었다고나 하겠다.

 

 

'시치미 떼다' 매사냥서 유래된 말

 

이밖에 "시치미를 떼다” '끈떨어진 매' '꿩잡는 게 매' '3뜯기'(매사냥꾼은 매털을 뜯고, 매사냥에 빠져 집안일을 소홀히 하니 땔감이 없이 울타리를 뜯고, 방사를 게을리하여 마누라에게 꼬집히고...) 등 매사냥에서 유래한 말이 지금까지도 속담처럼 흔적으로 남아있는 현상에서 예전에 얼마나 매사냥이 비중높은 놀이였던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우선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기 위해 '시치미를 떼다'라는 말뜻을 풀어보자. 시치미는 매방울과 함께 매의 꼬리에 다는 매주인의 이름표이다. 매가 꿩을 좇아 시야에서 멀리 갔을 때 꿩을 잡은 매의 위치를 곧 알아볼 수 있도록 소뿔을 깎아 주인의 이름을 새기고 하얀 거위털과 매방울을 달아 매꼬리에 부착한다. 그러면 꿩을 잡은 매가 꿩의 몸부림에 흔들릴 때마다 방울소리가 나고 하얀 거위털이 펄럭거려 먼 데서도 곧 눈에 띈다. 매로부터 꿩을 재빨리 떼어내지 않으면 굶주린 매가 꿩을 많이 뜯어먹어 더 이상 사냥할 생각을 하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린다. 매가 달아났을 경우에 대비해 시치미에는 매주인의 이름을 새겨놓는 것이다. 멀리갔던 매가 다시 배가 허기가 지면 인가에 드는데 이때 남의 집에 들어간 매는 시치미떼이는 신세가 된다. 사냥매가 워낙 대접을 받던 시절이라 남의 매를 갖게 된 사람은 매주인 이름이 새겨진 시치미를 떼어 버리고 자기 것인 양 태연해 한다. 그런 모습을 두고 '시치미를 뗀다'고 했는데 요즘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모습을 일컫는 뜻으로 쓰인다.

 

매사냥은 고조선 시대에 북방 수렵 민족인 숙신족으로부터 들어왔다. 백제때는 이를 일본에 전해 주었고 일본은 또 미국 등 서구에 전파 시켰다. 고려때는 '응방'이라는 관청을 두고 매사냥을 국가적으로 관리했으며 원나라에 '해동청 보라매'라는 사냥매를 조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또 조선 시대에는 '내응방'이라는 관청을 두고 군역 대신 매를 잡게 했으며, 그 후 일제때는 허가제 아래에서 매사냥의 맥이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60-70년대 이후 산업화에 따른 이농 현상과 자연 훼손으로 매사냥은 어느날 우리 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래서 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도 사진이 아닌 그림밖에 나오지 않는다.

 

 

조선시대 관청 두고 국가적으로 관리

 

진안의 매사냥이 발견된 것은 10여년 전의 일이다. 필자가 겨울에 이곳을 지나 가다가 우연히 찾아내서 기사화 했던 것이다. 지금 진안 매사냥의 주인공은 백운면 운교리 박찬유씨다. 전에는 이웃마을 전영태 옹이 진안 매사냥의 터줏대감 노릇을 해왔는데 2년 전 타계했다. 전 옹은 매사냥으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그 분은 20대부터 작고하기까지 50 여년 동안 매사냥을 해왔다. 10여년 전 문화관광부의 조사 결과 '전영태 패' 매사냥이 전국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매사냥꾼 들이라고 밝혀 지기도 했다.

 

 

매사냥 50년 전영태옹 인간문화재에

 

매사냥은 찬 바람을 타고 매가 날아드는 11월 중순 이후 야생매를 받는 일(매를 귀하게 여겨 '잡는다'고 하지 않고 '받는다'고 한다.)로부터 시작된다. 산등성이 시야가 넓은 곳에 살아있는 멧비둘기를 미끼로 하여 매장(매그물)을 친다. 그리고 매장으로부터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장 움막을 치고 미끼에 연결된 줄을 가끔 흔들어주며(비둘기가 꿈틀거리도록) 매가 날아들 때까지 기다린다. 매가 비둘기를 채러 급강하하다가 그물에 휘말리게 되는데 매가 퍼덕거려서 날개가 상하기 전에 재빨리 그물에서 떼어내야 하기 때문에 위장막에서 숨을 죽이고 밤낮 며칠이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잡힌 매는 집안으로 조심스레 모셔와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다. 매 훈련이란 우선 사람과 낯을 익히고,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식사량을 줄이고(허기져야 꿩을 보면 사정없이 달려든다. 또 살을 줄여야 민첩해 진다), 사람이 먹이를 주면서 부르면 날아와 받아먹는데 익숙하게 길들이는 것이다.

 

다음회에서는 사냥매의 종류와 사냥 중 매가 부리는 기상천외한 재주 등을 소개한다.

 

/여행전문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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