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해를 돌아보니 배움엔 끝이 없더라"
"우리 예술할 때는 참 가난했어요. 연탄장사라도 이런 시일 했으면 벌써 구멍가게라도 하나 차렸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했다 싶어요. 특히 외국인들에게 찬사를 받을 때면 내가 우리 것 안했으면 어디서 이런 귀한 대접을 받았겠냐는 생각이 들곤 하죠."
이 정도 했으면 됐을 법도 한 데, 그는 배움이란 끝이 없다고 했다. 국악 인생 60년. 그 쉽지 않은 세월을 구비구비 넘어온 김일구 명창(68·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준보유자)이 평생동안 딛고 살아온 무대에 제자들과 함께 선다.
28일 오후 7시30분 국립국악원 예악당과 4월 6일 오후 7시30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김일구류 아쟁산조 보존회가 주도적으로 마련한 제자들의 헌정무대이기도 하다.
"가만히 세어보니까 제자들이 어림잡아 500명쯤은 되는 것 같아요. 안그래도 아쟁을 가르친 제자들이 더 많은데, 제가 판소리만 하고 다니다 보니까 아쟁 제자들이 화가 났나봅니다."
그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두 분야의 장원을 휩쓴 유일한 명인. 1979년에는 아쟁으로 기악부 장원을, 1983년에는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차지했다. 서편제 '춘향가'로 알려진 김동문 명창의 아들로 소리를 먼저 시작했지만, 열일곱 무렵 목이 시원스럽게 나오지 않아 장월중선 선생을 찾아가 아쟁산조를 배웠다. 여성국극단 악사로 부산을 찾았다가 원옥화 선생의 가야금산조에 빠져 그 길로 제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명창은 "아쟁도, 가야금도 좋지만 그 재미는 판소리가 제일 앞선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 음악을 안좋아하지만, 전통은 아무리 낡아도 값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뿌리를 버린다는 건 아버지를 버리는 것과 같지요."
무엇이든 뿌리가 든든해야 한다는 명창. 그의 아내는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장인 김영자 명창이며, 기타를 매고 피아노를 쳤던 두 아들은 '젊은 명창'으로 주목받고 있는 도립국악원 창극단 김경호씨와 우석대 국악과를 다니고 있는 김도현씨다. 그는 "같은 예술을 하더라도 무대에 오르면 서로 잘하려고 하는 경쟁상대가 된다"며 가족들에게 더욱 엄격한 눈을 들이댔다.
2000년 국립국악원을 정년하며 전주 한옥마을에 온고을소리청을 차린 그는 보이지 않는 텃세에 전주가 아직도 객지같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나 예술에서나 인생에서나 언제나 동반자가 되어주는 아내가 있어 든든하다.
국악인생 60년 기념공연에도 아내와 함께 오른다. 그는 "맨날 '적벽가'만 불렀더니 다른 소리는 못하는 줄 안다"며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부르겠다고 했다. 아내는 '소적벽'이라 불릴 정도로 까다로운 '수궁가' 중 '토끼 배가르는 대목'을 부른다.
평소 '사부(師父)'라 부르던 스승의 무대를 위해 전국은 물론,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60명이 엮는 아쟁산조 합주는 특히 기대를 모으고 있다.
폭포수라도 뚫을 듯 장쾌한 소리로 부르던 그의 '적벽가'가 빠져 아쉽다면 29일 오후 3시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에서 열리는 '신(新) 판놀음'을 찾아가자. 김청만 명고와 함께 '적벽가' 눈대목 '공명이 동남풍 비는 대목'에서 '조자룡 활 쏘는 대목'을 들려준다.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명창의 무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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