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 뒤에 보이지 않는 창조의 길을 걷다
햇볕이 넉넉하게 내리쬐는 날 도심을 조금 벗어나니 가을색이 곱게 물들은 시골 정취를 만날 수 있었다. 새로 뻗은 시원한 길 대신 그 옆으로 마을과 연결되는 구불구불한 길을 선택한 건 바쁜 일상에서 잠시라도 가을을 느끼며 여유를 부려보고자 하는 마음때문이었다. 더욱이 작곡가 지성호씨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에 감성을 풍부하게 살려보자는 심산도 있었다.
예전에 우연히 찾았던 '풍경소리'라는 카페. 이 집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었는데 이제 보니 작곡가의 집이란다. 아담하지만 정성스레 다듬어진 정원과 함께 황토로 지어진 2층 건물은 시골 정취를 거스르지 않고 제 자리에 앉은 듯 편안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맞이하는 지성호씨를 만나보니 주인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 배어있는 주인의 향기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리라. 직접 설계하고 나무 하나, 돌 하나도 손으로 가꾸는 정성은 그의 음악세계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는 음악을 작곡하는 것과 집을 설계하는 것은 균형, 비율, 공간 개념 등에 있어 같은 맥락이라며, 어느 것 하나 끝나지 않는 숙제라고 말했다. 한 곡 한 곡 완성해가는 정신적인 노동 뒤에는 한 글자씩 읽어가는 독서와 한 땀씩 만들어가는 집안일의 육체적인 노동으로 흐름을 이어간다. 그래서 예술과 생활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그만큼 음악은 자신 자체이며 인생이고 철학인 셈이다.
음악이 곧 생활이 되어버린 사람. 그가 작곡가로 자리잡게 된 것은 한 순간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음악의 기반을 다지게 되는 몇 번의 계기가 만들어지는데, 어릴 적 풍금 반주자였던 고모를 따라 우연히 접하게 된 아름다운 선율은 환희와 감격의 시작이 됐고 노래 부르기를 즐겨하는 습관으로 굳어지게 됐다. 또한 면단위이면서도 마을에 조직됐던 금관악대는 음악 속에서 생활하는 특권을 갖게 했다. 그 후에도 음악은 그를 작곡가로 이끌었다.
그러나 음악은 보이지 않는 창조적인 것이어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힘겨움으로 회의가 들 때도 있었지만 이제 음악은 포기할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라며 긴 호흡으로 자신의 인생을 한 음표씩 만들어가는 것이란다. 그의 음악은 '음악극'에서 더욱 빛을 발하여 2002년 '혼불' 작곡을 시작으로 2004년 '정읍사', 2005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2006년 '논개', 2008년 '흥부와 놀부' '정읍사-달아 높이 올라' 등 샘솟는 옹달샘처럼 자신의 음악극을 무대에 올렸다. 서양음악을 전공한 그이지만 그 지역에 맞는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악과 조화롭게 접목해 우리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술이 생활이라는 그의 말이 실감이 난다. 이처럼 많은 곡들을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그의 생활이 음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깃줄에 앉아 있는 참새들이 음표가 되었을 것이고, 살랑거리는 갈대의 흔들림도 감성을 자극해 음악극의 어느 한 대목을 장식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겸손하다. 인문학적 교양이 기반이 되어야만 그 위에 예술의 성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독서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들이 바탕이 되어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시킨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음악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오늘도 화려한 무대 뒤에서 고독한 작곡의 세계에 빠져 있다.
/구혜경(문화전문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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