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의 함성 되살아나는 동학군의 성지를 가다
가을의 향기가 물씬 나는 26일 전북일보와 전주문화사랑회는 전주시민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길을 따라'라는 주제로 답사를 떠난다. 김제 원평과 구미란 전투지, 전봉준 생가터, 무장기포지, 무장읍성, 선운사도솔암 마애불 등이 이번 답사코스이다. 그동안 정읍 고부를 중심으로 진행해오던 답사코스에 변화를 주어 김제 원평과 고창지역으로 코스를 정하였다.
▲ 김제 원평과 구미란 전투지
김제 원평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이 많은 지역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93년 3월 동학교단이 주도한 집회가 보은에서 있었을 때 전봉준을 비롯한 호남지역 동학지도자들이 바로 원평에서 집회를 개최하였다. 원평집회를 통해 전봉준 등은 농민봉기를 구체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원평은 농민군 진영의 총참모를 맡았던 김덕명 대접주의 관할지역으로도 유명하다. 김덕명은 전봉준보다 나이가 많지만 동학농민혁명 기간 내내 전봉준을 심적 물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봉준이 어린 시절 김덕명의 집에서 식객으로 생활하면서 인근마을 서당에 다녔다는 구전도 전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자 김덕명은 결국 체포되어 전봉준과 함께 재판을 받고 같은 날 서울에서 처형당하였다. 원평은 또한 무명농민군들의 무덤이 남아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 패배이후 후퇴를 거듭하다가 이곳 원평 구미란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큰 전투를 벌여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배한 곳이다. 농민군들의 시신이 산을 덮었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마을 사람들은 그 시신을 구미란 뒷산에 묻었다고 한다.
▲ 봉준 생가터
동학농민군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은 많지 않다. 전봉준의 생애에 대해 그래도 자세하게 알려진 것은 동학농민혁명 이전 3년 정도이다. 전봉준은 그렇게 3년 동안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져 갔다. 그렇게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한국사의 발전과정에서 영향은 매우 크다. 전봉준과 관련하여 특히 논란이 많은 부분이 출생지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주장된 출생지는 전주 출생설, 고창 당촌, 고부 조소리, 정읍 산외 지금실, 정읍 덕천 시목리설 등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전봉준의 출생지는 고창 당촌이라는 데 어느 정도 의견접근이 이루어졌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전봉준선생은 본래 고창현 덕정면 당촌 태생으로 세대 사림가의 집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천안전씨 족보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확인된다. 또한 전봉준 선대의 묘가 이곳 당촌에 남아 있으며 전봉준이 어릴 때 부친이 이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001년 고창군에서 생가를 복원하였다.
▲ 무장기포지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당산마을에 위치한 무장기포지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포고문을 발표하고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한 곳이다. 1894년 3월 13일 고부 농민봉기가 해산되자 전봉준은 탄압을 피해 당시 동학의 최대 세력을 가지고 있던 손화중을 찾아가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손화중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결국 전봉준과 뜻을 같이하여 태인의 김개남 대접주, 원평의 김덕명 대접주 등과 뜻을 모아 이곳 구수마을에서 1894년 3월 20일 창의문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으로 나아가게 된다. 포고문이 세상에 알려지자 농민의 호응은 대단하였고 이후 전국적인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선운사 도솔암에는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磨崖佛)은 글자 그대로 바위를 갈아 부처를 형상화한 것이다. 바위의 높이는 대략 20m 정도이며 부처는 그 위에 새겨져 있다. 부처는 약간 눈을 감고 있으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앉아 있으며 특이하게도 사람으로 치면 배꼽 정도에 큰 구멍, 즉 감실(龕室)이 있다. 그런데 이 감실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이 감실에는 신비한 비결(秘訣)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하는데, 비결과 함께 '벼락살'이 있어서 여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1820년 전라감사로 재직하던 이서구가 마애불의 감실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는데 별안간 벼락이 쳐서 '이서구가 열어 본다'는 대목만 얼핏 보고 도로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1892년 8월 어느 날 손화중 대접주 휘하의 동학교인들이 이 마애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고 한다. 이후 무장, 고창, 흥덕, 영광, 장성 등 여러 고을 사람들이 손화중 포(包)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후 손화중 휘하의 동학교도들은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주력으로 활동하였다.
과거의 역사적 흔적을 찾아다니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알기 위함만은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100여년전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된 동학농민혁명은 바로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내용과 방향은 미래 후손들의 삶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병규(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심사담당관)
※ 이번 답사는 '동학농민혁명의 길을 따라'(안내 이병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심사담당관) 26일 오전 9시 전주역사박물관 출발
금구→원평 구미란→원평 장터→ 학수재→고창고인돌공원&박물관→전봉준 생가→모양성→무장기포지→무장읍성→선운사→도솔암 마애불→장성 황룡촌 전투지
※ 다음 답사는 10월 10일 '일제시대 전주의 기억들-억압과 저항'(안내 홍성덕 전주대 교수)
※ 답사신청은 전주문화사랑회(www.okjeon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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