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석굴암 복원이나 신라고분 조사가 일제의 문화정책 홍보와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일제강점기와 우리 문화유산의 오늘'을 주제로 다음달 4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고대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문 '일제강점기 한국미술사 구축과 석굴암의 발견'을 통해 일제의 석굴암 복원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입증할 예정이다.
강 교수는 한국고대학회가 31일 배포한 발표문에서 일제가 "자기들이 (석굴암을) '발견'했고 '수리'했으며 '복원'했다"고 선전한 것은 자신들이 영화로운 조선의 과거를 되살릴 수 있는 식민본국임을 강조하려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일제는 석굴암을 "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것인 양" '발견'됐다고 선전했으며 수리와 복원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 가봐야 하는 제국주의의 성공적 지배의 상징"인 관광지로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석굴암은 처음 조성됐던 종교적ㆍ예술적 맥락을 잃어버리고 '일제에 의해 변모된 조선 근대의 표상'으로서만 대중에 인식되도록 '재맥락화됐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일제가 석굴암과 같은 당시 조선의 유물을 평가절하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거꾸로 석굴암과 본존불을 동아시아에서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 이유는 석굴암을 비롯한 조선의 옛 유물은 결국 '전근대'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에 의해 '근대화'를 겪어야 할 대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제는 석굴암과 본존불을 칭찬하면서도 이와 대비해 당시 조선의 현실이 '쇠락한 문명'이라는 것을 늘 강조했다.
실례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조선미술사'에는 조선의 미술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에 걸쳐 발달의 정점에 달했고 고려에는 쇠퇴의 조짐을 보이다가 조선시대에는 쇠퇴를 거듭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러한 일제의 평가는 결국 1920~193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까지도 과거 유물에 대해 찬탄하면서도 당시의 처지를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 평가가 발달한 문명을 가진 일본이 낙후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가 됐음은 물론이다.
강 교수는 조선의 문화재가 아름다운 여성적 곡선미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것 역시 일제의 이데올로기가 주입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식민지 조선을 '약자(弱者) 여성'에 비유함으로써 '남성 제국주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라는 것이다.
김용성 중원문화재연구원 원장은 함께 배포된 발표문 '일본인의 신라고분 조사'에서 1920년대까지는 한반도 침탈을 위한 제국주의 인류학ㆍ고고학 조사에서 소외됐던 신라고분이 1921년 금관총(金冠塚)의 발견으로 활성화된 점에 주목했다.
그는 금관총에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돼 관심이 집중되자 일제의 국위선양과 문화정책 홍보에 도움이 됐고 이 때문에 이후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서봉총 (瑞鳳塚) 등의 다른 신라고분 발굴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김 원장은 일제가 이처럼 국위선양과 홍보에 도움될 화려한 유물에만 집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무덤형태와 봉분구성 등은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보고 일제가 발굴한 신라고분들을 적극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기성 한신대박물관 특별연구원은 '일제 강점기 석기시대의 조사와 인식'에서 일제강점기에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였던 토리이 류조(鳥居龍藏)가 했던 석기시대 관련 연구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밑거름이 돼 '한일강제병합 정당화'에 쓰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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