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모습과 냄새가 담겨진 들판 농사꾼인 내겐 너무나 소중한 책
누런 나락들이 베여지고 흔적만 남은 아슴한 들판에 지평선이 검붉은 밑줄을 그을 무렵. 내차게 불어치던 들바람이 제풀에 겨워 누그러지는 해 다갈 때쯤 나는 콩깍지 태우는 은근한 냄새 같은 걸 맡는다. 틀림없이 다 턴 서리태 꼬투리를 불꽃에 쓸어 얹는 어머니 모습이 마당귀를 감아올리는 흰 연기처럼 모락거렸으나 그것을 오래된 책 냄새쯤으로 여겨오던 나는 다시 나만의 계절이 찾아왔음을 느낀다. 독서에 알맞은 철이 따로 있을까하지만 만상이 숙연해지는 가을의 날목 십일월을 나는 몫 받아두곤 한다. 논두렁 가 마른 풀 더미에서 포슬포슬 종이의 촉감이 느껴지는 한철 저마다 낱장으로 펼쳐놓은 논배미들을 추려 한 권의 잘 익은 내용을 엮어 읽는다.
딴전을 좀 부리자면 농사꾼인 내게 들판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책이라 할 것이다. 거기에는 먼저 사람의 모습과 냄새가 소담히 담겨 있다. 씨 뿌리고 거두기까지의 일정이 사계의 풍경 속에 담채처럼 드리워져 있다. 먹고 사는 방편으로써 뿐만이 아닌 농투성이들 살아가는 일들이 일기체로 적혀 있다. 이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들녘이야기들을 나는 모든 세상살이에 접목시켜 읽는다. 한창 때 나는 필히 읽어야 할 두 권의 지침서를 추천받아 두터운 날밤들을 새운 적이 있는데 그 하나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이고 다른 것은 T.볼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거기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는 오욕칠정이 아마 사람 사는 서사라 여겨 훗날엔 후배나 자식들에게 권하기도 하였으나 실감하지는 못했었다. 그저 남의 일인 냥 겉핥았던 이야기들을 이제 조금이나마 동냥할 수 있게 된 까닭은 그만큼 생이 깊어진 노릇이기도 하거니와 그 방대한 사건과 배경의 줄거리들이 어쩌면 이 들판의 작은 삶들을 확대경으로 비춘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이 터전에서 읽을 수 있음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이 책에는 절로 익어 터지는 이름 모를 풀씨들의 문장이 있다. 왜가리 부리에 집힌 미꾸리와 말라가는 도랑에 몰린 송사리 떼의 파닥거림이 있고, 저대로 몰아치는 비바람의 커다란 너울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다. 나는 문자화 되어 있지 않은 이 자연한 경전을 서툰 자모 같은 철새들의 울음을 빌어 주워 먹곤 한다.
표제가 없는 이 들판에 '아버지의 공책'이란 제목을 붙이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기 때문이다. 종이로 감히 비견할 수 없는 흙살 위에 아버지는 많은 것들을 적었다. 섣부른 생각보단 육필로 자연의 순리들을 적었다 지우고 다음 해 또다시 자박자박 적어가며 알뜰한 생을 꾸리고 자식들을 길러냈다. 그리하여 이 들판은 필사할 수 없는 단 한 권 아버지의 유작인 셈이다. …… 좀 억지스런 사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금 삼동을 내내 빈 들판 간서치看書癡가 될 요량이다.
▲ 김유석 시인은 1989년 전북일보 시 부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상처에 대하여」(2005)를 출간했다. 김제 출생인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시를 쓰고 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