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며칠이라도 가족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휴식이 되고 삶의 위안과 평안을 얻었다 올해도 넉넉한 마음으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겠지…
마음은 이미 고향으로 가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로 이어지는 정지용 시'향수'를 떠올리지 않아도 한가위에는 옛 시절 향수를 떠올리는 이야기가 새록새록 피어난다.
명절 음식을 맛볼 때면 어머니의 체취를 맡으며 깊은 위안을 얻곤 했다. 추석을 맞아 아동문학가 안도씨가 어린 시절 한가위 추억을 전한다.
추석 하루 전날이면 마을사람들은 동구 밖에 나가 목을 뺐다. 그 당시에는 전화도 없어서 어느 시간에 도착할 지도 모르는 자식들을 아침부터 기다렸다. 마침내 버스가 비포장 신작로를 덜커덩거리며 마을 어귀에 도착할 때면 객지로 떠난 식구들이 짐보퉁이를 하나씩 들고 올챙이 떼처럼 올망졸망 무리지어 내린다. 그러면 약속이나 한 듯 달음박질쳐 얼싸 앉고 울고 웃다가 "이게 누구야?" "아이고 많이 컸네." 등의 너스레를 떨며 집으로 돌아간다.
기뻐도 울고 슬퍼도 우는 것이 우리네 미풍양속이다. 그 틈새로 아버지가 새 신발을 사가지고 오면 밤새 꼭 끌어안고 온 동네를 뻐기며 뛰어다닐 생각에 잠을 뒤척였다. 나의 어린 시절은 누구나 가난했다. 옷도 거의 기워서 입었고 신발도 다 해질 때까지 신었다. 그런데 무조건 새 옷을 입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그날이 설과 추석 명절이었다. 그래서 명절 아침이 되면 누구나가 새 옷을 입고 서로 자랑하느라고 진풍경이 벌어졌다. 아무리 가난해도 이 때는 추석빔으로 양말 한 켤레씩은 사 주었다. 항상 구멍이 나서 꿰매 신던 양말인데 새 양말을 신을 수 있었으니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이불, 베게 호청을 뜯어 빨고, 창호지로 창문 바르고 집안 대청소가 시작된다. 기왓장 부순 가루로 가마니를 펴놓고 놋그릇을 닦고 온 집안이 북적거렸다. 우중충하던 하늘이 청잣빛으로 변하고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추석전야, 밤이면 극성스럽게 울어대던 풀벌레들과 함께 밤이 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추석날이 밝아온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음식을 장만하고, 아버지는 지방쓰고 밤 치고, 상차림 격식에 맞게 차례 상을 차리시는 동안, 우리들은 새 옷을 입고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마당도 쓸고 심부름을 했다.
추석 차례 상에는 여름 내내 땀과 정성으로 키운 햅쌀밥을 비롯하여 선홍빛 감도는 대추, 홍시, 알밤이 오르고 그해 봄고사리며 올콩으로 만든 두부와 산나물들을 그릇그릇 담아 올렸다. 어느 것 하나 정성이 가지 않은 제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다소곳이 절을 했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았던 것은 지성껏 조상을 섬기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던 어르신들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온 가족이 성묘를 가는 길가엔 깻단과 수수밭과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그때는 동네마다 추석날 저녁에 콩쿠르가 열렸다. 허술한 회관 마당에 무대가 생기고, 상품이 진열되고 낮부터 확성기 소리가 산천을 울렸다. 콩쿠르는 객지와 고향에 살던 사람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 마을 축제였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면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 무대로 뛰어올라가 춤을 추었다. 서로 떨어져 가난하고 눈물겹게 살던 부모 형제들이 한 덩어리가 된 무대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마을은 오랜만에 생기를 되찾았다.
이렇게 콩쿠르를 마치면 마을 사람들은 다시 사랑방에 모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달을 보고 술 마시고, 강정과 볍쌀산자를 먹으며 수다 떠느라고 밤을 새웠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 했던가? 명절이 끝날 무렵 부모님의 사랑, 고향의 그리움과 추억을 가득 안고 바리바리 싸주신 꾸러미를 가슴 가득 채워 떠나는 자식들이 못내 아쉬워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물을 훔치며 손을 흔들었다. 둥근 달이 훤하게 뜬 밤이지만 함께 어깨를 비비며 뒹굴던 추석, 그들이 다시 떠나버린 고향의 텅 빈 달빛 아래 남아 외롭고 쓸쓸히 갈무리했다.
돌이켜 보면 한가위는 단지 명절이어서만 즐거운 게 아니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다만 며칠이라도 가족과 함께 곡식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또 하늘이 높아져 가는 모습을 보고, 모처럼 밤하늘 보름달 아래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휴식이 되고 삶의 위안과 평화를 얻는 것이다. 올해 추석에도 한가위 달만큼이나 크고 넉넉한 마음으로 독자들의 마음도 풍성하고 화사했으면 좋겠다. 각박한 문명 속에서 소진한 에너지를 재충전 하길 기원한다.
△ 아동문학가 안도씨는 국제펜클럽 전북이사장, 전북대 팽생교육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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