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날아온 허백씨 "다른 이의 삶도 보여"…전주익산 수녀들 "종교 간 대화 좋아요"…순례꼭두 오병옥씨 "걷는 즐거움 빠졌죠"
지난 1일 개막한 '2012 세계순례대회'가 중반을 넘겼다. 전북도와 한국순례문화연구원이 5일까지 이어진 '아름다운 순례길'(전주~완주~김제~익산·240㎞)을 완주한 이들은 고작 20여 명.
이날 오전 9시 미륵사지에서 출발한 이들은 초남이 성지까지 8시간 동안 25.5㎞를 걷고 또 걸었다. 구릿빛 얼굴을 한 순례객들이 이야기했다. "포기하지 않고 돌아가는 게 오늘의 목표야."
△ 낭만? 즐거운 고행
미국 LA에서 날아온 허백씨는 순례길을 걷겠다고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 중 하나. 군산에서 태어나 전주 YMCA 사무총장을 맡다가 박정희 정부 시절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던 그에게 고향은 늘 사무치게 그리운 곳이었다. 아름다운 순례길의 여정을 두고 "오직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축복" 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온 고문규씨는 유일한 외방객이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떠올리며 만사 제쳐두고 왔다"는 그는 사실 많이 망설였다. 지리산 둘레길을 즐겨 다니던 친구들도 매일 20~25㎞를 걷는 건 부담스럽다며 포기하던 터였다. 그러나 자신의 뒤통수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배낭을 짊어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무수한 순례자를 보면서 "스스로 앞만 보고 달려온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순례길에 뒤따르는 무리 중 눈에 띄는 것은 아홉 명의 수녀였다. "월요일은 유일하게 쉬는 날이라 오게 됐다"는 전주·익산 지역 수녀들은 "종교 간 대화가 이뤄지는 것 같아 좋았다"고 했다. 아마 치마를 입고 순례길에 오르는 유일한 무리였을 듯.
△길 걷기 최고 마니아는 이병호 주교
가톨릭 전통에서는 순례길을 걷고 나면 그가 저지른 모든 죄를 사하여 준다 했던 '참회의 순례길'이며,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영성의 길'로 통한다. 이번에 아름다운 순례길을 걷는 종교 지도자 중 최고의 걷기 마니아를 꼽으라면 단연 이병호 천주교 전주교구장일 것이다. 못다 외운 성서를 적은 메모지를 들고 매일 1시간 넘게 치명자산을 도는가 하면 한 달에 한 번 '아름다운 순례길'을 걷는다.
자신이 가르치는 전주 성심여중 학생들과 3년 째 '아름다운 순례길'을 걷고, 산티아고 순례길마저 소화한 순례꼭두(길안내해설사) 형은수씨는 "절대 고독의 상황에 나를 맡겨 도망갔던 나와 정직하게 만나고 싶었다"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처럼 잘 견뎌내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 순례자 여권 몇 명이나 받게 될까
신의 가호(?)가 따르는지 5일 째 순례객들은 무탈하게 걷고 또 걷는다. 출발지에서 구급차가 오히려 환자들을 기다려야 할 정도. 올해 삼양사를 퇴직한 뒤 순례꼭두로 참여한 오병옥씨는 걷는 즐거움에 빠져 안내자까지 자처했다.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땀을 뻘뻘 흘리는 악전고투 속에서도 순례자들은 "교만을 용서해 주시옵소서"라는 반성을 하게 된다고. 한국순례문화원은 순례길 완주를 한 이들에게 순례자 여권을 발급한다. 이번 수료자는 몇 명이나 배출될까.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