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부터 금요일마다 30대 젊은층 모여 삶 얘기 / 미술에 소질 없어도 참석 서로의 경험을 경청·공유
네모난 카세트 테이프 4개가 가방에서 꺼내졌다. 순간 탁자를 둘러싼 소파에 앉은 10여명은 보물을 발견한 듯이 “우와~”라는 탄성을 질렀다. 참석자들이 조심스레 카세트 테이프를 보는 사이 가수 ‘람다’의 ‘봄이 내게 말을 거네’라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른 참석자가 가져온 흰색 돌을 둘러앉은 사람들이 돌려가며 만져보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느낌을 바탕으로 1시간 동안 각자 펜과 색연필 등으로 자신의 화폭에 집중했다. 미술 전공자와 비 전공자가 섞였고 그림의 스타일도 기술도 각양각색이었다.
모임의 진행자인 최창우 씨(33)의 그림이 먼저 들려졌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를 기본으로 3개의 캐릭터를 그려 놓았다. 이를 두고 “요정이 봄 소풍을 가는 것 같다.”, “귀가 있는 물방울 캐릭터가 자신을 투영했다” 등의 해석이 나왔다.
비주얼 컬쳐 스튜디오 캔즈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최 씨는 “봄은 겨울잠에서 일어나 생명이 깨는 시기로 정령의 모습으로 이제 활동하겠다는 내면을 표현했다”며 “미술인에게 겨울은 힘든 시기로, 추억에서 오는 따듯함과 포근함을 캐릭터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지난 30일 오후 7시 전주시 완산구 동문길에 있는 커피전문점 삼양다방에는 스케치북과 연습장, 펜을 들고 12명이 옹기종기 모였다. 탁자 위에는 각양각색 수 십개의 색연필이 놓여 있었다. 매주 ‘불타는 금요일’에 그림으로 감성을 나누는 ‘무아지경 드로잉’의 회원들이다.
이들은 1차례 평균적으로 10여명씩 모여 먼저 자기 소개와 한 주의 안부를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30대 전후가 대부분인 그들은 직장생활의 고달픔을 토로하기도 하고 자신의 소소한 계획도 이야기했다. 이어 한 달을 터울로 오감을 자극하는 방식을 바꾸며 드로잉을 한다. 1월에는 사물을 보고 듣고 만지는 가운데 오는 느낌을 표현했다.
모임에 처음 참가한 사람들은 그림 실력에 부끄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제주도 출신으로 임실에서 목조 건축을 배운다고 소개한 정해원 씨(29)는 막상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되자 종이를 앞에 두고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정 씨는 “SNS를 통해 이 모임을 알고 타지에서 색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오늘 처음 참가했다”며 “그림을 손으로 직접 그리는 게 새롭고 어릴 적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새로운 회원이 오면 모임장인 최 씨는 재차 강조한다.
그는 “우리는 가르치는 모임이 아닌 서로의 경험을 경청·공유하는 만큼 그림은 기술이 아닌 내용에 초점을 맞추며 자신에 대한 이해의 도구다”고 말했다.
그림을 완성하면 각자의 그림을 돌려 본 뒤 진행자의 손에 차례로 그림을 들려 두고 자유로운 해석이 오고 간다. 뒤이어 그림을 그린 이가 자신의 의도를 이야기한다.
이날 허상익 씨(31)는 사각형으로 층층이 쌓은 구조물과 도미노, 상반된 표정의 두 마리의 곰을 그렸다. 이를 보고 “구조물을 애써 쌓지만 무너뜨리고 싶은 2가지 마음이 공존한다”거나 “겯혀 생활하는 본인과 현대인을 표현했다”는 의견이 줄이었다.
허 씨는 “테이프를 보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테이프를 장난감 삼아 놀던 기억이 났다”며 “당시 할아버지는 애지중지한 물건으로 손주가 장난하는 걸 싫어해서 화난 표정을 넣었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참여자의 그림이 모두 지나가자 저녁 10시가 넘었다.
3번째 참가한 박정원 씨(30)는 “매주 소풍을 온 것 같다”며 “짧은 시간에 낯선 사람끼리 모여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해진다”는 소감을 말했다. 그는 이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가 알고 싶고, 풀이를 들으면 다양하고 깊이 있는 사고에 놀라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 모임은 지난해 9월25일부터 이뤄졌다. 현재 회원수는 50여명이지만 출석 횟수는 자유다. 회비도 없다. 주로 SNS를 통하거나 입소문으로 알음알음 찾아 온다. 자신을 주제로 드로잉하며 삶을 이야기한다.
‘무아지경 드로잉’을 만든 최 씨는 “대학생과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대화 주제가 주로 ‘스펙 쌓기’로 취미가 없다는 말을 듣고 답답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며 “그림으로 메마른 감성을 깨우고 여유를 찾는 방안으로 시작했다”고 들려주었다.
그는 이어 “이제는 그림만 보고 누구인지 알게 됐고 결석하는 회원들을 서로가 궁금해한다”며 “자신을 알고 이를 나타내도록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고 모임을 지속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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