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920m, 올 탐방로 개방 / 지리산·대마도까지 시야에 / 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경남 양산 천성산(920.2m) 정상을 원효봉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출입 통제된 이곳은 지난 2월 지정된 탐방로에 한해 전격적으로 개방됐다. 그럼에도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지역 산꾼들만이 알음알음 다녀오고 있다.
△가을 억새 물결 아름다워
내원사∼은수고개∼천성산∼화엄벌∼내원사 순의 원점 회귀 코스를 설계했다. 진작 오를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가을을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은 컸다. 은수고개에서 원효봉, 화엄벌을 타고 넘는 억새 물결은 아름다웠다. 게다가 올가을은 유난히 더 청명해 주변 산군과 부산·울산 시내는 물론이고, 멀리 지리산과 대마도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참고로, 내원사에서 은수고개까지 3㎞가량은 과거 된비알(몹시 험한 비탈)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덱(deck) 계단이 잘 조성돼 그렇게 난코스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물론 은수고개에 닿았다면 그 다음부터는 황홀경을 즐기는 일만 남았으니 덱 계단이 설령 조금 힘들다고 하더라도 보상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듯하다. 건강한 어르신이나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어린이를 동반해도 좋다.
△티끌조차 깨끗이 씻고 들어서라
자가용을 가져왔다면 ‘숲속 제1주차장’을 들머리 겸 날머리로 잡는다. 매표소에서 내원사로 가는 도중에 있다. 산행 후 내원사를 구경할 요량이라면 내원사 바로 아래의 주차장을 이용해도 된다. 하지만 주말이라면 이곳에서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티끌조차 깨끗이 씻고 건너라는 의미의 ‘세진교(洗塵橋)’와 부도를 잇달아 지나면 내원사 옆으로 이어진 오솔길로 들어설 수 있다. 오솔길은 계곡을 따라 깊숙이 연결된다. 전날 내린 비로 물소리가 더 크고 시원한데, 계곡에 떨어진 나뭇잎 색깔이 수상하다. 단풍이라고 하기에는 푸르고, 여름 이파리라고 하기에는 약간 울긋불긋하다. 계절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숲 그늘로 들어서면 여름 기운은 더 이상 감지하기 어렵다. 시원한 것이 아니라 서늘해서다.
된비알이 시작될 무렵 덱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고 가파르다. 이를 20분 정도 쉬지 않고 오르니 허벅지가 뻐근하다. 지도를 보니 해발 100m가량을 그렇게 올랐다.
△안돌이 ‘조심’…된비알은 더 없어
덱 계단이 끝나면 능선 길이 이어지고, 더 이상의 된비알은 없다. 그러나 한두 곳에서 안돌이를 거쳐야 한다. 험한 벼랑길에서 바위를 안고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그 지점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예사롭지 않다. 안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폭포처럼 장쾌하다.
산죽 숲을 관통하면 은수고개에 이른다. 은수고개는 네 갈림길로, 천성산 정상인 원효봉과 천성2봉이 갈라진다. 취재팀은 원효봉으로 향했다. 올라온 방향에서 오른쪽 능선이다. 정상까지는 아직 2.5㎞ 남았다.
하지만 사방팔방으로 조망이 들어온다. 부산 시내는 물론이고, 영도 봉래산, 그 너머로 일본 대마도까지 한눈에 잡힌다. 북쪽으로는 신불산과 고헌산, 멀리 경주 남산과 언양 시가지도 보인다. 서쪽으로 지리산도 희미하게 관측된다. 이런 호사가 없다.
△석 달 전 석보체로 새긴 ‘천성산 원효봉’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정상 부근에서 지뢰밭 표지를 보니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뢰는 이미 다 제거됐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표기해 놓은 듯하다. 지뢰밭 표지 뒤로 울타리 길이 이어진다. 길은 옛 군부대 자리를 크게 우회하며 정상에 이른다. 비록 탐방로에 한정된 길이긴 하지만 정상이 열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흡족하다.
그동안 울타리 사이로 뚫어 놓은, 이른바 ‘개구멍’을 통해 알음알음 정상을 밟은 시절을 떠올리면 더욱더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제 떳떳하게 정상에 오르고,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뒤 블로그에도 올릴 수 있다. 그럼에도 네이버와 다음을 포함해 각종 온·오프라인 지도에는 아직도 천성산 정상을 우회하는 등산로가 그려져 있으니 안타깝다.
정상에는 1. 8m 높이의 정상석이 서 있다. 지난 7월 양산시가 새로 설치했다. ‘천성산 원효봉’이란 글씨도 뚜렷하다. ‘석보상절’에서 따온 서체라고 해서 ‘석보체’로 불린단다. 석보상절은 세종 때 소헌왕후 심 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이 석가모니 일대기를 한글로 풀어 만든 책으로 알려졌다.
정상은 오랫동안 군부대로 사용된 까닭에 평평하고 넓다. 1960년대 설치된 부대는 2003년 이곳을 떠났다. 지금은 막사조차 다 철거되고, 녹슨 철망 일부와 ‘필승’ 표석만이 남았다. 정상 바로 아래의 드넓은 군 부지는 지세 회복을 위해 아직 출입을 막고 있어, 잡초가 무성한 푸서리가 됐다.
△ ‘화엄벌→내원사’ 뒷길 폐쇄
하산은 화엄벌로 하면 된다. 원효대사가 중국에서 건너온 1000 명의 대중을 가르쳤다는 곳으로, 자료에 따르면 축구장 17배에 달하는 2만 8000여 평의 고산 늪지대란다. 지금도 앵초, 물매화, 잠자리난, 흰제비난, 끈끈이주걱과 같은 다양한 습지 식물이 살고 있다는 설명을 길섶 이정표에서 읽을 수 있다. 화엄벌도 탐방로만 열려 있다. 2002년부터 화엄늪 습지보호지역으로 묶인 까닭이다.
화엄벌에서 내원사로 곧바로 내려서는 길은 최근 생태계 보호를 명분으로 폐쇄됐다. 따라서 임도를 따라 걷다가 해발 420m 지점에서 산길을 찾은 뒤 원점인 ‘숲속 제1주차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주차장에서 내원사까지는 걸어서 1∼2분 거리다. 1300년 역사의 내원사는 현재 비구니 절인데,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수옥 스님이 새로 지었다고 한다. 글, 사진 부산일보=백현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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