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산 ‘단짠단짠’ 바다 향기가 가득
-영덕대게 먹고 자란 탄탄한 육질 ‘영덕영해초’
-작지만 생생한 단맛으로 세계의 식탁 점령하는 ‘포항’
어릴 적부터 시금치는 과일처럼 단 음식인 줄 알았다. 적절한 짠맛에 고소한 참기름 향이 가득. 간단한 양념 외에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시금치 무침은 과장을 조금 보태 디저트로 먹어도 될 정도로 달큰한 반찬이었다.
대학 진학 후 하숙집에서 첫 끼를 받았을 때 가장 놀랬던 것이 바로 이 시금치 무침이다. 질퍽한 식감에 맹물처럼 싱거운 시금치 맛이라니. 함께 넣은 마늘이나 파 향이 더욱 강해 시금치 대신에 다른 나물을 넣어도 별 차이가 없을 듯했다.
겨울 방학이 되고 고향에 다시 내려와서야 알았다. 지금껏 내가 먹어온 시금치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경북 동해안 바닷가 바로 옆에서 소금기를 잔뜩 머금다 보니 키도 작고 볼품없는 이것이 오히려 극강의 단맛을 숨기고 있었구나.
◆적은 양념일수록 살아나는 단맛과 짠맛
경북 영덕과 바로 옆 포항에는 겨울이면 참 먹을 것이 많다. 대게며 과메기 등 해산물은 이미 너무나 유명하니 논외로 하자. 그러나 겨울철 우리 식탁을 책임질 시금치가 이맘때쯤 경북 동해안 지역의 최고 육지 특산물임을 간과하는 사람이 많다. 얼마나 특별하기에 '영덕영해초', '포항초' 등 별칭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다.
국내 시금치는 크게 두 가지 종자로 나뉜다. 먼저 봄에 파종해 여름에 먹는 서양계이다. 병충해가 적고 더운 기후에 잘 크는 대신 맛이 싱겁다. 여름에 먹는 시금치는 거의 이 종류이다.
이와 달리 가을에 파종해 겨울에 수확하는 영해초와 포항초는 모두 동양계이다.
경북 동해안 시금치는 주로 바닷가에서 기른 것을 최고로 친다. 가름막 하나 없는 바닷가 옆 동산에 온갖 바람을 맞고 자란 것들이다. 워낙 춥고 매서운 바람을 맨몸으로 맞다 보니 겉보기에는 참 볼품이 없다. 키가 작고, 잎도 좁으며 군데군데 너덜거리는 곳도 있다.
반면에 짙은 붉은색의 뿌리와 선명한 녹색의 잎이 모양과 달리 생생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온종일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축적된 은은한 짠맛과 시금치 본연의 단맛이 더해져 다른 지역과 달리 무척 오묘한 풍미를 자랑한다.
경북 동해안에는 조금 특별한 시금치 요리법이 있다. 살짝 데쳐낸 시금치를 양손으로 힘껏 쥐어짜서 일부러 30분에서 1시간을 체에 밭쳐둔다. 물기를 최대한 없애 시금치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다.
적절히 마른 시금치에 풍미를 위한 국간장 조금과 소금, 참기름, 깨소금을 넣는다. 양념은 이게 끝이다. 절대 향이 강한 마늘이나 된장, 파 등을 넣으면 안 된다. 시금치 향과 단맛이 씹으면 씹을수록 계속 배어 나오는 요리법이다.
◆버려진 영덕대게 껍질의 맛있는 변신 '영덕 영해초'
요즘 영덕 영해초는 겨울 제철을 맞아 수확에 한창이다.
영덕 바닷가 노지 중에서도 예부터 영해면에서 나는 시금치를 최고로 쳤던 까닭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영해면 연평들과 병곡들판 114㏊의 재배면적에서 연간 약 3천648톤(t)이 생산돼 영덕지역에서 재배되는 채소 중에서는 배추 다음으로 많다.
영해초가 특히 유명한 것은 독특한 밑거름에 있다.
유명한 영덕대게의 껍질을 발효시켜 시금치 퇴비로 사용한다. 대게 껍질에 풍부한 키토산은 항균·항생 작용을 하는데다 토질에 양분을 공급하고 영양 흡수를 도와 인공비료를 상대적으로 적게 쓸 수 있다. 더욱이 건강기능식품인 키토산은 혈중 콜레스테롤을 개선하고 체지방을 감소시키며 혈관 질환 예방 및 세포재생이나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영해시금치작목반은 키토산 밑거름을 바탕으로 연중 고품질의 시금치를 생산해 전국 대형마트와 서울 가락시장 등으로 공동 출하하고 있다.
영해초는 9월 중순부터 파종해 10월 말부터 이듬해 7월 중순까지 수확할 정도로 수확기가 길다. 키토산 밑거름 덕에 휴지기를 갖지 않고도 토양의 질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겨울철을 거친 시금치는 성장 속도가 느리지만 육질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은 데다 병충해까지 적기 때문에 가장 선호된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하버드 공중보건대학 연구소는 '세계 10대 슈퍼푸드'로 시금치를 선정했다. 칼슘과 비타민 K가 풍부해 뼈 건강과 노화 방지에 뛰어나다는 것 외에도 비타민A, B1, B2, C, E 등이 골고루 함유된 만능식품이다.
여기에 시금치는 세포를 재생하고 암세포를 억제하는 베타카로틴 성분, 신경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뇌혈관 질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엽산, 눈을 건강하게 하고 보호하는 루테인 성분이 풍부해 현대인에게 딱 맞는 푸른잎채소이다.
◆한국을 넘어 세계로…경북 대표 농작물 '포항초'
경북 전체 시금치 재배면적인 약 400㏊의 거의 절반 정도인 202㏊가 포항에 있다. 반면, 여기서 생산되는 시금치 '포항초'의 생산량은 연중 고작 2천790t으로 그리 많지 않은 양이다.
오직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재배된 진녹색의 겨울철 시금치만을 출하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시기에 생산되는 양만은 전국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한다.
각별한 자부심으로 포항시는 아예 2015년 '포항초'에 대해 지리적표시제까지 등록했다. 이보다 앞서 1980년대부터 '포항초'라 이름을 붙였으니 브랜드 시금치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다.
일반 개량종 시금치와 비교하면 키가 작지만 영양분이 뿌리부터 잎까지 고르게 분포돼 향과 맛은 훨씬 뛰어나다. 뿌리 부분까지 흙이 쌓이도록 모래산을 쌓아줌으로 무엇보다 뿌리가 길고 강하면서 빛깔도 보기 좋은 붉은색을 띤다.
아이러니하게도 포항초는 지역에서 먹기 어려운 음식이다. 생산량의 대부분이 수도권이나 아예 외국으로 팔려나가는 탓이다. 3년 전부터 홍콩 수출길에 오르고 있으며 올해는 3천376㎏이 수출돼 1만6천665달러 실적을 올렸다. 내년에는 캐나다까지 수출 판로가 확대되며 포항이 전국 최대 시금치 수출 지자체에 오를 전망이다.
같은 포항초도 여러 종파가 있다. 해맞이로 유명한 호미곶에서는 '해풍시금치', 칠포해수욕장 근처의 '곡강시금치'란 별명으로 생산되며, 이 밖에 청림동·연일읍·동해면 등에서도 포항초가 출하된다.
진정한 보물 시금치는 겨울에 노지에서만 재배한다.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파종하고 11월 10~15일부터 캐기 시작해 2월 말~3월 초까지 수확한다.
이처럼 한국의 시금치는 본래 가을에 씨 뿌려 봄에 먹었다. 추운 겨울을 바깥에서 견디면서 단맛이 응축됐다. 요즘은 하우스 등 시설에서 재배하거나, 여름 등 더울 때면 고랭지에서 재배한다. 덕분에 사시사철 시금치를 먹게 됐다. 하지만 시금치 특유의 단맛이 사라졌다. 제철이 아닐 때, 시설 재배한 시금치는 심심하다. 농민들은 '물시금치'라고도 부른다.
매일신문=박승혁•신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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