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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의 설 풍경 변화상] 핵가족 중심 사회, '마음 설레는 설' 추억 속으로

세뱃돈 기다리던 대가족·마을잔치 시절서 한족·조선족 문화 어우러진 퓨전식 지내다 최근엔 한국서 쇠거나 가족여행 떠나기도

▲ 1980년대 이전 설날 모습. 할아버지와 손주들이 장기를 두고 있다. (출처 : <사진으로 보는 중국조선족민속> ,연변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회 편, 연변인민출판사)

설에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설날에 가족들이 모여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조·부모님께 세배를 올리며 덕담을 건네는 풍습이 조상 대대로 이어지면서다. 지난 연말 본보와 교류협약을 맺은 연변일보의 취재를 통해 중국 교포 사회의 설 풍습을 특집으로 마련했다.

 

최근 들어 설이 설 같지 않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노인은 물론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이라는 전대미문의 변혁을 거치면서 그동안 오롯이 지켜오던 설 문화 역시 그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70년대 농촌에서 동년시절을 보낸 전 모 씨, 옛날에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설날이었다고 한다. 이유는 다름 아닌 맛있는 음식 먹을 수 있었고 새 옷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세뱃돈을 가질 수 있는 것 때문에 더욱 기다려지던 설이었단다.

 

그때는 비록 풍족하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설날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명절을 보낸 가족이 많았다. 평소 먹기 힘들었던 육붙이도 먹을 수 있었고 육류가 더해진 따끈한 떡국은 그야말로 별미였다고 말한다. 특히 농촌에서는 젊은이들이 어르신이 계시는 집들을 돌며 세배를 드렸고 가족끼리 설을 쇠다가 나중엔 마을 잔치처럼 되어가곤 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감동적이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 설을 맞아 연길 백산호텔 로비가 초롱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80허우’(80년 이후 출생한 중국의 외동아들, 딸들을 지칭하는 말)들은 대문가에 높이 걸린 빨간 초롱과 한밤의 찬 공기를 가르며 요란하게 터지는 폭죽 소리, 갓 가마에서 건져낸 뽀얀 김이 피어오르는 물만두(교자)를 설날 이미지로 떠올린다. 개혁개방의 혜택을 제일 먼저 받은 세대인 그들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보낸 편이다. 그런 그들 역시 설날이면 폭죽놀이를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를 올리고 세뱃돈을 받는 재미가 좋았으며 사촌들끼리 간식을 나눠먹는 재미, 어른들의 화투판에 참견하는 재미도 즐거웠다고 말한다.

 

30대의 회사원 최 씨는 어린 시절 설날을 추억하며 식구들은 12시가 되면 꼭 물만두를 빚어먹었다고 말한다. 물만두를 안 먹으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어른들의 말에 졸음에 고개를 끄덕끄덕 떨어뜨리면서도 물만두는 꼭 먹었다는 것이다. 또 어릴 적엔 예술을 좋아하는 할아버지 덕분에 설날이면 식구들이 모여 작은 음악회 수준으로 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누구나 다 자신의 개인기 하나쯤은 내놓아야 했고 그것이 안 되는 사람에겐 벌칙으로 김치 움에서 언배(겨울이면 사과배를 얼리었다가 녹여 먹었는데, 연변 지역에서는 그것이 아주 좋은 간식이었다.) 나르기 심부름을 맡아해야 했단다.

▲ 상점에서 설 용품을 구입하는 사람들.

그때는 집집마다 거의 그랬다. 설날 우리 민족 전통음식인 떡국을 먹는 집도 있었고 한족들처럼 물만두를 빚어 먹는 집도 있었다. 따라서 설날 식구들이 모여앉아 가장 흔히들 하는 놀이는 윷놀이나 화투치기 혹은 트럼프치기나 마작이었다. 이처럼 80허우들의 설은 한족의 설 문화와 조선족의 설문화가 어우러진 이른바 퓨전식 설 문화라 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그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농촌의 마을은 평소와 별로 다른 데가 없이 고즈넉하다. 혹은 노인들이, 혹은 자녀들이 자식을 찾아, 부모를 찾아 타향이나 타국으로 가는 게 새로운 풍속도가 되기도 한다.

 

집집마다 가족이나 친지들이 한국이나 미국, 일본 등 나라로 외화벌이를 떠나거나 혹은 젊은이들이 베이징이나 상하이, 심천 등 대도시로 진출해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으니 연변은 이제 고향이라는 아득한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다. 특히 중국의 1자녀 정책으로 요즘 사회 주류를 이끄는 젊은 층들 거개가 외독자들이다 보니 이른바 핵가족중심의 사회가 형성된 지 오래다. 식구가 적으니 당연 설이라 해도 전 같은 흥성흥성한 분위기를 내기 어려웠던 것. 게다가 소득이 높아지면서 평소에도 이왕의 설 못지않게 지내다 보니 맛 나는 음식, 예쁜 옷, 세뱃돈 때문에 기다려지던 설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3년째 설은 한국에 가서 쇠고 있다는 이씨(30)는 “부모가 모두 한국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모뿐만 아니라 친척들 거의 모두가 한국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고향에 남겨진 자신이 한국에 가서 설을 쇠고 돌아오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그래야 친척들이 다 모일 수 있어 설 같은 설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이 씨네 가족뿐만 아니다. 불확실한 통계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 있는 조선족은 수십만 명이 된다고 한다. 어떤 가족은 친지들마저 대부분 한국에 있다 보니 한국에서 친척들이 모이는 것이 더 편하고 쉬운 일이 돼버렸다. 그러다보니 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결혼식이나 지어 환갑까지도 한국에서 치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 대가족이 함께 쇠는 옛 설 모습.

그런가 하면 대학 졸업 이후 천진에서 취직하고 결혼 후 아이까지 낳은 장 씨(37)는 설마다 로비를 6000위안씩 팔면서도 기어이 고향인 연변에 와서 설을 쇤다고 했다. 고향에 홀로 계시는 아버지가 안쓰러운 것도 있지만 그래도 고향에 와야 설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게 이유였다. 다행히도 그의 친척들 중에는 노무를 나간 사람이 적어 그래도 모이면 설 분위기를 제대로 낼 수 있단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돼지고기를 넣고 만든 시래기된장국은 오직 고향에서만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어 설날이면 꼭 그 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올해에도 장 씨는 자가용을 몰고 아내와 둘이서 16시간 동안 번갈아 운전하며 고향으로 설 쇠러 올 것이라고 했다.

 

공무원 장 씨(35)의 설은 남들과 색 달랐다. 지난 설 연휴 기간에 남편과 아들과 함께 황산으로 유람을 떠났다고 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조선어문(한국어)교과서에서 ‘황산’을 소개하는 글을 배웠으며 그래서 황산에 가보고 싶어 했다고 말한다. 공직에 있다 보니 평소 긴 휴가를 낼 수 없어 설 연휴동안만은 시름 놓고 긴 여행일정을 잡을 수 있었단다. 그녀는 설에 이처럼 가족이 함께 즐기며 새로운 문화체험을 하는 시간은 아주 소중했다고 말한다.

 

설이 설 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제 날(옛날) 할머니가 몰래 감췄다 꺼내주는 달콤한 엿 사탕의 유혹도, 푸짐히 차려진 설음식상에 자꾸만 할아버지 먼저 젓가락이 올라가 어른들의 핀잔을 듣던 아이들도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다.

▲ 연변일보=박진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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