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 건
스스로 ‘바보’가 되어야 가능한 일
‘사랑’과 ‘이별’, 어쩌면 우리네 삶의 영원한 화두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 읽은 ‘세계명작소설’의 큰줄기를 이끌어가는 스토리도 대부분 그거였던 걸로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랑과 이별. 이 둘을 즐겨 다루기로는 대중가요라고 물론 예외일 리 없었고, 여전히 없다. 그 안에 담긴 뜻을 풀어낸 해석의 가지가지 또한 일곱빛깔 무지개를 수십 배 뛰어넘고도 남는다.
어떤 이는 사랑을 두고 ‘향기로운 꽃보다 진한 바보들의 이야기’라고 했던가. 그걸 ‘차가운 유혹’과 ‘때늦은 후회’라고 정의한 건 혹시 ‘이별’에 대한 경계심 때문? 하긴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사랑이 찾아오면 가슴을 닫고 돌아서 오던 길로 가리라’면서 속울음을 꺼이꺼이 삼켰을까. 동전의 양면 같기만 한 이 둘을 제법 오래전에 우리들의 ‘태스형’이 단박에 정의를 내린 바 있음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으리라, 눈물의 씨앗이라고.
살아오는 동안 누군들 사랑의 환희와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이별의 고통을 한두 번쯤 겪어보지 않았으랴. 우리 지역 출신 가수 송 아무개가 오래전에 부른 노래를 이 자리에까지 굳이 끌어댈 필요는 없으리. 제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별이 남긴 ‘당신의 슬픔’을 치유하는 데는 남녀나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세월만 한 약이 없다는 데 이의를 달 이들은 별로 없을 테니. 이쯤에서 만해(卍海)의 시 한 편을 새삼스레 다시 꺼내 읽는다.
리별은 美의創造입니다
리별의 美는 아츰의 바탕(質)업는 黃金과 밤의 올(絲)업는 검은비단과 죽엄업는 永遠의生命과 시들지안는 하늘의 푸른꼿에도 업습니다
님이어 리별이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엇다가 우슴에서 다시사러날 수가 업습니다
오오 리별이어
美는 리별의創造입니다
구구절절 과장이 지나쳤으되, 사랑 없는 이별이 없다는 데는 동의한다. 이별이 아픈 만큼 사랑도 깊었을 터, 그와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뒤늦게야 깨닫는 우리네 어리석음이라니. 사랑이 이별이고, 이별이 곧 사랑이다. 하여, 세상 어디에도 이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만한 게 없다는 만해의 역설에 이의를 달기가 쉽지 않다.
무릇 사랑이란 ‘as you want’ 혹은 ‘It’s up to you’로 번역되는 ‘너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자식에게든 연인에게든 이웃에게든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 그걸 기꺼이 실천하는 것.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한다는 건 그러므로 스스로 ‘바보’가 되어야 가능한 일. 문득 눈앞을 서성이는 두 사람의 얼굴이 있다.
‘바보’로 불리는 걸 기꺼이 즐거워했다던 추기경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던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던 그 ‘바보’의 투박한 얼굴도 있다. 퍽 쑥스러워하는 낯빛으로 통기타를 어설프게 퉁기면서 음정박자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부르던 <상록수>가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러서일까. 아니면 사랑하다 이별한 연인들처럼 그토록 수많은 봄꽃이 한바탕 잔치를 끝낸 뒤끝이어서일까. 그도 아니라면 우리 동네 문신 시인의 말처럼 인생의 충분한 이유를 알 만한 나이를 지나서 이별의 아픔 따위에는 면역이 생겨서일까. 사랑하다 헤어지면 다시 보고 싶고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다고 했던 심수봉의 노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으니.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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