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05 06:09 (목)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문화일반
일반기사

[문화공간] 화랑, 지역미술 발전에 동참 그러나 앞은 캄캄

지난해 연말, ‘한국미술 50년’을 기획했던 서울의 한 갤러리는 전시기간동안 매일 뒤를 잇는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관객이 많았던 날은 줄잡아 2천여명의 관객이 다녀갔다는 집계도 나왔다. 가뜩이나 열악한 미술환경속에서는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역의 화랑으로서는 그저 먼나라 이야기로만 들릴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렇다면 국립이나 공공미술관도 아니고 이윤을 남기는 상업화랑의 이런 ‘대박전시’가 서울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전북에도 화랑문화가 있는가고 묻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물음이 부정을 전제로 한것이라면 그는 지역미술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거나 진지한 애정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전북의 화랑들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 못지 않게 이지역의 미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어려움을 기꺼이 분담해온 공로자들이기 때문이다. 전북미술의 화랑문화 흔적을 70년대를 기점으로 읽어낸다면 백제화랑(월담 미술관)이 그 뿌리다. 다방이 곧 미술인들의 전시실이 되었던 시절, 상설전시와 작가들에게 전문적인 전시공간을 제공했던 백제화랑은 지역 작가들에게 뿐 아니라 전국의 작가들이 전주를 찾아오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비록 대관에 의존했던 운영이었지만 백제화랑은 전주의 묵향을 잇게 한 다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북의 본격적인 화랑문화는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표구점들이 화랑으로 대치되었던 시절을 지나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전주에는 전문적인 화랑을 내세운 공간들이 문을 열었다. 온다라미술관, 얼화랑, 대성화랑. 1년 사이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문을 열었던 이후 80년대말과 90년대 초에 이르는 5-6년동안 전주는 이들 화랑들을 발판으로 미술 전성기를 이루었다. 전북 화랑문화의 삼두마차시절이라해도 좋을 이 시기에 전북미술은 도약의 기틀을 다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시절 이들 화랑들이 재정적으로 자유로웠는가. 물론 아니다. 87년 문을 연 온다라미술관은 민족미술을 지역문화판에 굳건히 뿌리 내린 화랑이다. 이종구 신학철 임옥상 이철수 김호석씨를 비롯한 민족미술 계열의 역량있는 작가들은 물론, 적지 않은 작가들을 전북으로 끌어들이고 지역의 돋보이는 작가들을 초대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술품 유통에도 새바람을 일으켰다. 물론 대부분이 수만원짜리 판화에서부터 수십만원대의 소품들이어서 재정적 자립을 가져올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일반인들도 판화나 소품 정도는 구입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을 만들었던 것. 김인철 관장은 온다라 문을 내린 이후 5-6년동안 판매되었던 작품수를 정리해보니 4백50여점에 이르렀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온다라는 92년 문을 닫아야 했다. 더이상의 경제적 부담을 지탱할 수 없었던 것. 5년동안 김관장이 투자했던 자금은 3억원이 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문을 닫은 경우는 대성화랑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하게 지역작가들의 공간으로 자리잡고자 했던 대성화랑은 시설 대여에 운영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안게 되는 적자를 더이상 감수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삼두마차의 대열에서 그래도 살아남은(?) 것은 얼화랑이다. 운영자금을 최소한화하는 전략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는 한춘희관장은 기획부터 전시실을 지키는 역할까지 혼자서 해결하고 있다. 자연히 의욕은 있으나 기획전은 자제하고 있는 현실. 그나마 대관으로 일정부분 경비가 충당되고 있지만 빠듯한 재정 사정은 좀체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 화랑들은 한결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지역미술 발전을 다지는 사업을 꾸준히 기획해 운영했다. 이윤을 남겨야 하는 상업성을 추구해야하는 입장이지만 작가발굴과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특징적으로 운영했던 것. 기왕의 적자폭을 감수하면서도 지역미술이 안고 있는 과제를 해결해나가는데 기꺼이 나섰던 셈이다.

 

90년대에 이르러 일정한 역할을 했던 화랑들이 문을 내리는 동안에도 새로운 화랑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그러나 몇년을 못견디고 문을 내리는 안타까운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의욕적인 활동이 기대되었지만 3-4년만에 문을 내려야 했던 정갤러리도 그중의 하나. 그러나 화랑들 중에는 막연한 구상이나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화랑으로서의 역할은 커녕 오히려 부정적인 인식만 높이고 문을 닫은 화랑도 없지 않았다.

 

오늘에 이르러 열악한 미술환경을 개척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화랑들. 이들은 한결같이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다.

 

“작가 발굴과 창작활동 지원, 그리고 미술품의 대중화를 통한 상업성이 화랑의 역할이지만 일정한 경제적 기반이 없는 여건에서 대관에 의존한 운영 틀을 벗어날 수 없다. 특히 미술품 대중화는 아직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

 

기획전이나 대관, 미술품 판매 뿐 아니라 심포지움, 미술인 모임의 지원, 미술강좌, 포럼 등 대안다양한 사업들을 통해 운영의 출구를 찾고 있지만 운영의 어려움은 지역 화랑에게는 여전히 높은 장벽이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