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 방언의 요술사이자 이 나라 시인 부족의 족장’(이화여대 유종호교수), ‘서정주는 하나의 정부(政府)다’(시인 고은)…….
이밖에도 ‘신라 향가이래 최고의 시인’ ‘시신(詩神)’‘시성(詩聖)’등 한국의 대표시인 미당(未堂) 서정주를 표현하는 수사는 현란하다.
24일 타계한 미당 서정주 시인은 한국 순수시단을 대표하는 문단의 거목으로 그의 타계와 함께 ‘한국문학의 20세기’도 막을 내렸다.
그는 시력(詩歷) 7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15권의 시집과 1천편에 이르는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이미 몇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었고 미국, 일본 등 7개국 언어로 작품이 번역돼 읽히고 있다.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인 셈이다.
한국적인 정서와 모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시인으로서 그가 다양하게 보여준 형성력은 ‘20세기 한국문학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한때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무려 10편 가량의 시가 실렸다는 사실은 그의 위치가 얼마나 컸었나를 잘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전북 고창 선운사 부근에서 태어난 미당은 일찍 개명해 근대교육을 받은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 이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면서 퇴학당했고, 편입한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도 권고 자퇴당하는 등 학교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동국대 전신 중앙불교전문학원에 입학한 이듬해(19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작품 ‘벽’(최초의 작품은 1933년 12월에 게재된 ‘그 어머니의 부탁’)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미당은 김동리, 이용희,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
을 이끌며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30년대를 주름잡던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삼는 한편 20년대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시인부락>
이같은 시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고향의 원초적 서정과 외국의 문학세계였다.
41년에 첫 시집인
<화사집>
을 내놓은 미당은 해방 후 순수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을 내걸고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섰다. 그는 극심한 좌우 대결 속에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해 계급문학 또는 경향문학에 반대했던 것이다.
화사집>
그의 시적 경향은 한국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았고, 이후 교과서에 다수의 작품이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시적 편력은 보를레르와 니체, 그리스신화에 몰두했던 초기와 순수시의 논리로 민족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추구한 중기, 소박하고 진솔한 삶이 어우러진 고향이미지와 떠돌이 삶을 표현한 후기로 구분된다.
그의 시적 여정은 20대 화사집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 방황의 탐미적 아름다움을, 30대에는 귀촉도를 통해 전통적 정서와 가라앉은 톤으로 동앵적 사유의 본령을 탐색했다. 또 40대에는 한의 강물과 그것을 초극하는 노래를, 50대의 동천(冬天) 무렵에는 영생적 개안과 불교적 은유의 세계를, 60대의 질마재 신화 무렵에는 고향의 원형적 설화를 펼쳐온 장대한 흐름이었다. 70대 이후에는 킬로만자로에서 태평양까지 세계를 여행하며 세계 각국의 모습을 한국적인 정서로 녹여냈다.
하지만 필생의 시업은 그의 몇가지 행적 때문에 빛이 바래기도 했다. 일제 말기에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했고, 1980년 신군부 등장 후 당시 전두환 대통령후보의 찬조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그의 문학을 중심에 놓고 난 후에야 이뤄지는 문학 외적인 비판이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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