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을 즈음한 조선과 일본, 중국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이번 학술대회 첫 주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에서는 한·중·일 학자가 나란히 혁명 당시의 각국 국제정세를 설명했다.
이날 발표에서 가장 관심을 끌은 논문은 나카쯔카 아키라교수(일본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의 ‘갑오농민전쟁과 일본’.
그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최초의 무력행사였던 조선왕궁 점령사건(1894년 7월23일)이 축소, 왜곡돼 왔다고 주장했다.
일본 후쿠시마현 현립도서관에서 발굴한 ‘일청전사초안’(日淸戰史草案)을 근거로 이 사건이 “일본정부의 의도에 따라 조선주재 일본 공사관이 서울 주둔 일본군과 모의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군사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공식발간된 ‘메이지 27, 8년 일청전사’는 이 무력행동을 ‘조선병사의 폭거에 의한 소규모적인 양국 군대의 충돌’로 기술했다고 전했다. 그는 1894년 당시 일본군부 및 외무성 등이 조선왕궁점령사건을 축소·은폐·왜곡한 배경은 이 행위가 당시의 국제법상으로도 도저히 정당화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동학농민혁명과 한·중·일 3국의 외교활동’을 주제발표한 북경대 곽위동교수는 청일전쟁은 동학농민혁명을 핑계삼은 일본의 일방적이고, 치밀한 계산에 따라 발발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서원대 김정기교수는 “동학농민혁명의 반외세의식에 ‘반일’만이 강조되고 있지만 청의 ‘속방화정책’은 반청의식을 촉발시켰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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