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바라보는 역사가 묻어 있는 ‘숲정이’의 지면 지면에는 한상갑 교장(60·성심여중)의 열정과 손때가 가득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해성중 교사시절 창간호를 직접 만든 산파 역할을 했고 4백30호까지 칼럼을 쓰며 직접 편집을 맡는 등 ‘숲정이’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전주교구장 서리였던 김재덕 신부에게 전주시내 6개 성당의 합동 주보를 발행하자고 제안했더니 ‘그럼 한 번 만들어 보라’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엔 교구 소식지로 출발한 순수 주보였어요”.
단순히 통합 주보로 시작했던 ‘숲정이’가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군사독재정권과 맞부딪히는 상황까지 직면하게 됐다. 76년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3·1절 기도회 사건으로 수많은 정치인과 사제·사목들이 긴급체포된 뒤 재판이 진행되도 매스컴에는 단 한줄의 기사도 나가지 않았지만 ‘숲정이’는 20차례에 걸쳐 공판 방청기를 수록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79년 10·26이후 2년여 동안 칼럼 ‘소리’와 만평 ‘숲정이 산책’ 4컷만화 ‘요십이’등이 사전검열 당해 통째로 잘리거나 부분 삭제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광주사태 때에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나라와 죽은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라는 머릿기사만 넣고 나머지 4장을 성당소식으로만 채웠어요. 이전과는 다른 편집으로 군사정부에 저항한 셈이죠”.
한교장은 초창기 10년동안 군사정권의 숱한 탄압속에서도 한 회를 거르지 않고 ‘숲정이’를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외압을 막아준 어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소개했다. 당시 조성호(해성중)·천건(해성고)교장은 안기부 등 정부에서 한교장의 처벌을 요구했는데도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바람막이 역할을 해냈다고 한다.
“윗분들의 방패역할도 크지만 무엇보다 신자와 독자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숲정이’역사가 가능한거죠. 주보가 어려운 시절을 잘 버텨낸 만큼 더 성숙된 모습으로 영원할 거라고 봅니다”.
한교장은 현재 ‘숲정이’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한달 보름에 한번 꼴로 칼럼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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