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진 연꽃을 병품삼아 두르고 다채로운 전주연꽃예술제 행사가 한창이던 28일 오후의 전주덕진공원, 연신 부채질에 매달리는 인파를 헤치고 2m가 넘는 키다리삐에로가 공원을 휘젓고 다닌다. 얼굴은 온통 흰색으로 분칠을 하고 알록달록한 삐에로옷을 입은 키다리아저씨는 주머니에서 풍선을 꺼내들더니 금새 미키마우스와 강아지, 칼, 펭귄, 꽃 등을 만들어낸다. 어린이들이 ‘삐에로다’하는 탄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몰려들고 삐에로아저씨가 건네준 풍선을 들고 캬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다음날인 29일 오후 7시 전주학생회관에서 열린 ‘수험생을 위한 101콘서트’에서도 삐에로아저씨는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무대에 올라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청소년들에게 음주의 해로움을 이야기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술에 취한 모습을 연기하며 ‘과음이 계속되면 술이 나를 마신다’는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때론 키다리아저씨로, 어느새 진지한 몸짓의 세계를 빚어내는 이 사람은 ‘마임’에 인생을 건 최경식씨(36).
그는 주말만 되면 어디든 달려가 손짓 발짓 얼굴표정만으로 이야기를 엮어간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붉은 코, 멜빵바지를 입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상상의 날개를 펼치노라면 관객들은 배꼽을 잡다가도 어느새 진지함에 입맛을 다신다.
그는 전주시립극단 단원이자 달란트 연극마을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84년 전주대에 입학해 대학연극반에 발을 디디면서 연극과 인연을 맺은 최씨는 ‘오장군의 발톱’‘가면을 만드는 사람’‘물보라’등에 출연하면서 전북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정통연극을 추구하던 그가 마임에 눈을 뜬 것은 지난 96년. 세계적인 마임의 거장인 마르셀마르소의 공연을 지켜본 뒤 ‘아,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라고 직감했다.
“노인이 혼자서 1시간40분동안 무대에 올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마임을 풀어가는 모습을 보고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날 저를 사로잡았던 배우의 눈빛, 손짓 하나하나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연극이 세상의 축소판이라면 마임은 연극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죠.”
최씨는 곧바로 폴란드 마임가인 스테판 니지알코프스키의 워크숍에 참가해 마임익히기를 몰두했고 워크숍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임무대를 올렸다. 공연이 곧 연습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처음 공연할 때는 아직 수준에 미치지 못해 연극선배들로부터 핀잔세례를 들었지만 연습과 공연을 병행하는 그만의 방식은 짧은 시간에 그를 마임배우로 탈바꿈시켰다.
사실 전북에서 마임을 한다는 것은 사실 손이 귀한 집안의 자식과 같다. 마임은 연극과 달리 기획, 연출, 연기(배우)를 모두 혼자 감당해야 하는 탓에 외롭고 힘겹다. 도내에서 유일하게 마임이스트로 활동하는 최경식씨가 지난 몇년간 겪었을 마음고생은 짐작하고도 남는 대목.
그가 일년이면 1백여회의 공연을 갖는다. 주중은 물론 매주말마다 무대에 오르는 셈이다. 특히 찾아가는 공연에 열중한다. 그의 대표작들 가운데 ‘골고다 언덕길’‘선한 이웃’‘다윗과 골리앗’‘눈을 뜨게된 소경’‘돌아온 탕자’등이 성서를 기초로 하고 있을 만큼 교회나 성경학교 등에서 선교차원의 무대가 상당수를 차지하지만 학교나 도서벽지주민들을 위한 무대에도 소홀하지 않는다.
“마임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무대에 많이 서는 것이 목표였다”는 그는 “지금은 어느정도 소원을 이룬 만큼 앞으로 값진 공연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지난해 몽골지역으로 공연을 갔었는데 마임을 지켜본 몽골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재미는 있지만 한국적인 색깔을 찾을 수 없다고 꼬집더군요. 그때부터 한국적이고 전북의 지역색이 살아있는 마임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임에 우리가락을 접목시키는 작업에 매달리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임을 통해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삶의 위안’이라고 말하며 지난해 이맘때 민속무용단원들과 함께 다녀온 군산 무녀도 공연때의 일을 꺼낸다.
그는 “마침 출어기라 ‘왜 하필 바쁜 때 공연을 오느냐’는 차가운 시선 속에서 공연을 시작했는데 텅빈 객석이 어느새 주민들로 가득채워져 흥겨운 무대를 열었다”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학과 익살 속에서 인생의 진지함을 열어가는 우리 문화의 또다른 주인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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