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전은 호를 강산(江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박유전이 호를 강산이라고 한 것은, 박유전의 소리를 들은 대원군이 그를 가리켜, “네가 제일강산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제일강산’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말을 한 전후 문맥으로 보아, ‘제일가는 소리꾼’이라는 의미로 쓴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박유전의 호가 강산이었기 때문에, 박유전으로부터 이어받아 보성 지방에 전승된 소리를 특별히 ‘강산제(江山制)’라고 부르기도 한다.
박유전의 제자로 알려진 소리꾼은 이날치, 정창업, 정재근이다. 그런데 이날치와 정창업에게 이어진 소리는 강산제라고 하지 않고, 오직 정재근에게로 이어진 소리만을 강산제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명칭을 달리 한다는 것은, 그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똑같다면 굳이 달리 불러야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 연구에서도 정재근에게 이어진 소리와 이날치에게 이어진 소리는 매우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한 가지 가능성으로 드는 것은 박유전의 서울 생활이다.
박유전은 서편제 판소리의 시조라고 한다. 서편제 판소리는 서민적인 소리이다. 그러니까 본래 박유전은 서민적인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유전이 상경하여 대원군의 사랑에 묵으면서 양반들을 위해 소리를 하게 되면서 양반의 기호를 많이 반영하여, 말년의 소리는 서민적인 특성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날치와 정창업 등은 초년의 소리를 이어받았고, 정재근은 말년의 소리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특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박유전은 ‘새타령’(민요)을 잘 불렀다고 한다. 이 ‘새타령’은 이날치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동백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동백의 새타령은 이날치 이후 최고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동백의 ‘새타령’은 여러 차례 유성기판으로 발매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소리를 통해서 박유전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