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을 그대로 놓아둬라. 엄천강은 흘러야 한다.’
계미년 새해 벽두 지리산 사람들이 편치 않다. 최근 다시 불거져나온 댐건설 논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까닭이다.
눈덮인 지리산의 품에 고즈넉이 안겨있는 천년고찰 실상사로 향하는 남원시 산내면 어귀. ‘지역갈등 부추기는 댐계획 철회하라’고 쓰인 현수막이 산길을 넘어오는 방문객들에게 주민들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알리고 있다.
88고속도로 지리산IC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을 만나게 되는 남원 산내면 실상사앞. 폭설이후 날씨가 꽤 풀려 한낮에는 제법 따사로운 기운이 감도는데도 뱀사골을 숨가쁘게 내려왔을 계곡물은 수면 얼음장을 완전히 녹여내지 못했다.
10일 오전 이곳 주민 1백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리산댐 건설 추진계획 백지화 산내면 대책위원회’ 출범식이 열린 것. 대책위원회에는 산내면 번영회와 의용소방대·이장단·실상사 작은학교등 20여개 단체가 참여, 지리산에 댐을 건설하겠다는 경남 함양군수의 발언을 성토했다.
지난 1998년 경남 함양군 마천면 지역에 ‘문정댐’이란 이름으로 추진됐던 지리산댐은 당시 지역주민과 1백만 서명운동을 벌인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전면 백지화됐었다.
그러나 태풍 루사가 전국을 할퀴고 간 후인 지난해 10월 함양군이 ‘마천댐’이라는 이름으로 지리산댐의 필요성을 밝힌 문서를 건설교통부에 제출하면서 댐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함양군은 이어 지난해 11월말 함양 장기종합개발계획 공청회에서 댐건설 추진계획을 공식 발표한 이후 수차례 이같은 방침을 언급했다. 대형댐 건설은 사실 지자체의 계획만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
해당부서인 건설교통부와 수자원공사는 ‘댐건설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지만 주민들은 뒷짐을 지고 관망하는 듯한 이같은 응답이 미덥지 않다.
댐건설은 한번 추진될 경우 일단 백지화됐어도 휴면상태에 불과, 언제 다시 논의될 지 모른다는 게 댐 재추진 계획을 적극 저지하고 있는 지리산생명연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지난달 23일에는 마천발전협의회 주관으로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유림면 주민 1백40여명이 수자원공사 연수원과 용담댐을 견학, 환경단체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산내면 대책위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함양군의 댐 건설계획으로 인한 지역 주민간 불화와 반목은 자연재해보다 더 무서운 지역공동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며 “지리산이 더이상 개발의 논리로 위협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엄천강. 이곳 지리산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뱀사골과 백무동·칠선계곡의 물이 모여드는 하천을 이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한 명칭은 ‘임천강’이다.
지난해 7월 강 상류인 남원시 인월면 남천(람천)에서 발생한 벙커C유 유출사고 직후 인근 초등학교에서 ‘미안해요, 엄천강’을 주제로 한 작은 음악회가 열려 환경단체의 관심을 모은 곳이다.
문제가 된 마천댐(지리산댐)건설 예정지가 바로 이 강의 상류지역이다. 행정구역상 엄천강 유역은 대부분 경남에 속한다. 하지만 댐이 들어설 경우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곳은 강 상류 남원지역의 작은 하천 주변이다.
남원시 동면과 인월면·운봉읍에서 물길을 모은 ‘남천’은 산내면사무소 앞에서 뱀사골 계곡을 빠져나온 청정수와 합류, ‘만수천’으로 그 이름을 바꿔 실상사 앞을 지나 경남 함양군으로 흐른다. 그리고 이 하천은 지리산 백무동과 칠선계곡의 물길을 받아들이면서 댐건설이 예정됐던 함양군 마천면 문정리로 향한다.
만수천은 함양군 마천면사무소앞 백무동계곡과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비로소 엄천강(임천강)으로 불리게된다.
댐이 건설될 경우 남원 산내면과 운봉읍·인월·아영면 일대가 모두 직·간접적 영향을 받게된다는 게 관계자의 분석이다.
지리산 생명연대 김경일 사무처장은 “댐 만수위때는 실상사 3백m 주변까지 물이 차오르게 된다”며 “해발 4백m인 실상사 인근은 집중호우 지역인데다 유속이 빨라 높이 1백7m에 이르는 대형댐으로 하천을 막을 경우 수해가 잇따르고 토사및 암석 퇴적에 따른 피해도 심각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엄천강에 댐이 들어서면 지리산 생태계가 크게 위협받는 것은 물론 안개끼는 날이 늘어 벼농사 병충해와 상습 냉해·과실수확 감소로 이어지고 한봉과 축산업에도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주민들과 환경단체에서는 이제 개발의 논리로 끊임없이 위협받는 청정국토 1번지 지리산권역을 보호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국립공원 제1호로 생태계의 보고(寶庫)이자 문화유산과 전통적인 마을공동체가 도처에 산재한 문화·역사박물관 지리산의 가치와 상징성을 제대로 평가, ‘생태보존특별지구’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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