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한복판은 회색이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초록이다. 소설가 이상(1910~1937)은 자신의 수필에 초록을 권태의 색으로 표현했지만 초록은 희망을 안겨주는 색이며 인간은 누구나 싱그러움과 활력이 넘치는 초록세상을 갈망한다.
풀과 나무의 소중함이 새삼스러워지는 이 즈음, 길 위에 선 자신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레인맨'(배리 레빈슨)은 톰 크루즈·더스틴 호프만이 요양원을 나와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걸어가는 모습이 줌 아웃되며 끝없이 펼쳐지는 울창한 가로수길이 서서히 드러난다. 객석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진다. "아, 아름다운 푸른빛 가로수…”
우리 영화에도 이에 뒤지지 않는 멋진 숲길이 있다. '선물'(오기환)에서 주인공 이정재와 이영애가 걷던 삼나무 숲길. 길 양옆으로 하늘을 가릴 듯 길게 늘어선 삼나무의 각선미는 장관을 이루고 오솔길을 지나 만나는 드넓은 계단식 차밭의 푸름도 신선하다.
장동건·고소영 주연의 '연풍연가'(박대영)의 숲길도 근사하다. 푸른 삼나무가 사각으로 감싼 푸른 초지에 말과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풍경도 이색적이다.
'봄날은 간다'(허진호)의 대숲에선 사각사각 사랑이 변해 가는 아픈 소리도 들려온다. 싸아아∼ 싸아아∼ 빼곡이 들어선 대나무 사이로 들리는 그 소리에 어느 누가 들뜨지 않으랴. 그 아련한 소리에는 봄날의 서러움이 있다.
감동적인 숲의 모습이 잘 표현된 작품은 佛소설가 장 지오노(1895~1970)의 소설을 동명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나무를 심은 사람'(프레드릭 백)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 매일 3알의 씨를 뿌려 숲을 만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다시 살려놓은 한 사람의 80년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싹이 돋고 열매를 맺고 오랜 세월이 지나 결국 숲이 되어 푸른 물결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은은한 파스텔톤 영상에 "아무도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 숲이 만들어진 것을 몰랐다”는 잔잔한 내레이션은 너무도 아름답다.
신비로운 숲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서 볼 수 있다.
상냥하고 의젓한 11살 사츠키와 장난꾸러기에 호기심 많은 4살 메이는 퇴원을 앞둔 어머니를 위해 공기 좋은 시골로 이사한다. 도토리 나무가 우거진 숲을 뒤로 하고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낡은 집. 검댕 먼지가 묻어 나오지만 자매는 새로운 생활에 마음이 설렌다.
어느 날 메이는 뒤뚱거리며 숲으로 도망치는 동물을 발견한다.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숲길을 뒤쫓던 메이는 나무 밑동으로 굴러 떨어진다. 떨어진 곳은 괴상하게 생긴 동물의 커다란 배 위. 숲의 정령 토토로다.
"앞마당에 신기한 이웃이 살고 있어요!” 메이의 말을 믿지 않던 사츠키도 비가 몹시 쏟아지던 날 토토로를 만난다. 아버지에게 우산을 드리러 마중나가던 길에 우연히 만난 비를 맞고 있는 토토로. 우산을 빌려주자 토토로는 도토리 씨앗을 건넨다.
"자연은 경외하여 멀리 하는 것이 아니며,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받아들여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전하는 감독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관객도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쉽게 받아들이진 못한다. 토토로의 캐릭터는 좋아하지만 그가 숲의 정령으로 표현됐다는 사실을 금새 잊어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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