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되면 저혼자 피고 지던 논둑길 들꽃들도 집 앞마당 감나무도 물에 잠겼다. 번듯하진 않았지만 손때묻은 정으로 치자면 아깝지 않은 것 하나 없는 세간살이도, 대물려 온 문접옥답도 모두 잠겼다.
삶의 자취는 오간데 없고 물만 넘치는 그 자리.
'용담댐'을 유물로 만난다.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유형식)이 가을 기획특별전으로 마련한 '수몰된 옛 사람의 흔적 龍潭'이 9일부터 11월 16일까지 국립전주박물관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용담댐이 세워진 수몰지역 안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는 자리다.
이주가 시작된지 10년째. 사람들이 떠난 진안의 크고 작은 마을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으로만 만날 수 있는 그 자리에 옛사람들이 남겨놓은 유물은 유일한 삶의 자취다.
전시유물은 지난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모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던 조사로 발굴 된 것들. 구석기시대의 문화층,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집터, 돌널무덤, 고인돌과 밭, 삼국시대의 돌덧널무덤과 토성, 고려이후의 움무덤와 돌덧널무덤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눈길을 끄는 유물들이 적지 않지만 전북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적인 진그늘의 유물은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의 길이로만도 그 의미가 크다. 몸돌과 슴베찌르개, 밀개, 돌날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로 만나는 구석기시대를 지나면 네모난 문양을 새긴 빗살무늬토기의 아름다움이 신석기 문화사를 전한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여의곡은 당시 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던 지역. 고인돌 덮개돌을 운반한 흔적과 넓은 밭이 조사되면서 당대의 사회상을 밝혀내는 자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었던 곳이다.
삼국시대의 유적인 황산고분군과 백제토기와 대가야토기가 함께 출토된 와정토성은 역사의 흔적이 더 흥미롭다. 신라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승금유적과 고려이후의 유물이 쏟아져나온 수천리 유적은 보다 친근하다.
시대별로 진행되는 전시형식은 이지역 문화사를 정리한 공간. 다양한 유물을 한자리 모아 전시하는 의미 뿐 아니라 한 지역의 문화가 발생기부터 소멸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양상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김재홍학예연구사는 "지난해 조사 보고서가 완간된데 이어진 유물전은 용담댐의 역사를 정리하는 의미와 함께 90년대 전북지방의 발굴수준을 가늠하는 계가 된다"고 소개했다.
이번 전시에는 용담댐의 자취를 화폭에 담아온 진안출신 한국화가 김학곤씨의 기록화도 함께 전시됐다. 그 스스로 수몰민이기도 한 김씨의 그림은 입지적 특성과 자연적 환경, 유적의 형성과정의 이해에 새로운 통로가 된다. 역시 진안출신인 여태명씨의 화제가 덧붙여져 예술작품인 동시에 학술자료로서의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지 않다. 유물로 만나는 유적의 역사성이 크게 다가오는 전시의 한편에 민속이나 근현대사가 숨쉬는 보다 생생한 공간이 빠져 있는 탓이다.
김재홍씨는 "당초 발굴이후의 상황이나 실향민들이 남긴 삶의 자취를 보다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전시를 기획했었으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흩어지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물속에 남아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아쉽게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 유물들은 기획전이 끝난 이후 상설전시실로 옮겨져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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