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의 목에 힘줄이 선명하게 돋았다. 금새라도 터질듯한 쉰 소리. 처절하게 요동치는 그 소리가 가슴을 파고 들었다. 고수의 북채가 긴장하며 허공에 멈추어 있는 사이, 우주는 멈추었다. 순간, '아이쿠''그렇지''암만', 여기 저기서 쏟아지는 추임새로 소리꾼은 겨우 숨을 고른다.
그랬다. 판소리는 그렇게 치열하게 소통하는 생명의 소리인 것이다.
언제부터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조차 여전히 미지의 대상인 판소리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 7일 유네스코가 판소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때부터 판소리는 더이상 작은 나라 한국만의 문화가 아니다.
두시간 세시간, 도대체 지칠 틈없이 토해내는 저 소리의 정체는 무엇인가고 눈 크게 떴을 외국인들에게도 판소리는 이제 문화자산이 된 것이다.
전북은 판소리의 땅. 이 지역에서 판소리의 역사는 굿굿하다. 그 근원은 여전히 애매하나, 전라도 땅에서 만들어져 생명을 이어왔다는 사실은 이곳 전라도 문화의 역사를 새삼 주목하게 한다. 그 역사는 탄탄하여 판소리 고장으로서의 자긍심을 가능하게 하지만 판소리의 가치가 오늘과 만나는 지점은 전통과 연륜,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오늘날의 판소리는 여전히 공간에 갇혀 있고, 일상속의 노래가 되기에는 여전히 멀리 있는 까닭이다.
전북은 판소리의 역사에 무엇이고, 판소리는 전북의 무엇인가.
세계가 그 가치에 눈을 떠 지켜야할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판소리를 등재한 지금. 더욱 새로워진 판소리의 생명을 온전히 지켜나가야하는 일이 우리 앞에 와있다. 치열하게 소통하는 판과 소리의 역사를 일궈가는 작업이 시작됐다.
민중들 삶과 결합 전라도 소리로 정착
판소리는 훌륭한 소리꾼의 목청에 얹혀진 독특한 가락과 저 뱃심 깊숙이에서부터 올려지는 소리의 만남이 어우려져 안겨주는 감동 이전에 이미 우리의 원초적인 삶의 정서로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앗아내는 독창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 힘은 판소리가 삶의 체험을 내용으로 하면서도 단순히 삶의 질서와 행태를 풀어놓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인식의 기반 위에서 담아내는 사회적 성격, 이를테면 [갖고 누리는 자]의 입장에서보다는 [없이 살고 억눌려 살아온 자]들의 한과 고통이 치유될 수 있는 정서를 녹녹하게 담아 낸 위에서 세워진 것에서도 비롯된다.
판소리 연구자들은 판소리의 기원을 육자배기류의 남도민요나 세습무당들의 무가에서 찾아내고 있지만 그것의 발생과 형성의 정확한 모습을 밝힐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다만 그동안의 학설에 따르면 조선 숙종 때에 발생하여 영·정조때 비로소 자리잡았으며 1800년대에 전성기를 맞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정리된다.
연구자들은 판소리 초기의 명창 宋興祿의 출현 이전까지를 형성시대로 보아 그 구체적인 시기를 정조 중엽인 1800년께로, 전성시대를 송흥록으로부터 협률사의 창건(1902년)까지로 분류하다. 협률사의 공연으로 판소리는 이후 창극으로의 전환이라는 변모를 이루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에 따라 전성시대를 다르게 파악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판소리는 우여곡절을 겪어오면서 1960년대에는 명창을 인간문화재로 지정, 그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전승시키는 노력을 오늘의 작업으로 세워두고 있다. 판소리는 창우(昌優)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
이러한 창우들은 전국에 두루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전라도의 창우들은 명창으로서의 빼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매우 독특하게도 판소리 명창은 전라도 땅에서만 배출된 사람들이었는데 이는 판소리가 이 지역의 독특한 정서와 삶의 토양, 그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하기에 족하다.
조선 숙종때 발생 1880년대 전성기
전북출신 권삼득 모흥갑 전승 앞장
1960년대 명창을 인간문화재 지정
대부분의 연구자들도 [무가의 선율이 육자배기로 되어 있고 무가의 반주로 시나위가 연주되는 지역에서만 판소리명창은 배출될 수 있었다]는 이보형씨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판소리의 음악적 측면은 호남의 무악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고 정리한다.
그러나 판소리의 사설을 구성하는 근원설화가 한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것인 점을 들어 [호남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판소리는 전국 각 지역의 설화와 그 지방의 음악이 결합된 조잡한 형태의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판소리가 동리 신재효에 의해 정리되기 이전까지는 모두 열두 마당이 있었다. 장끼타령, 변강쇠타령, 왈자타령, 배비장타령, 심청가, 흥부가, 토끼타령, 춘향가, 화용도,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 옹고집타령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판소리
형성 초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각각의 소재는 전국적인 것인데다 그 사설이 그 지방의 음악과 결합되어 전승되면서, 판소리의 초기형태가 이루어졌다.
'조선창극사'를 쓴 정노식은 판소리의 시조로 하한담과 최선달을 꼽는다. 이들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고수관·송인영·임춘학·이봉국·김난득 등 대부분은 충청도 사람들이다. 그러나 판소리사를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 [丁亥
完文]에는 염계달·송흥록·김계철·염계량·고수관이 소개되어 있다. 또 송만재의 '관우회' 역시 우춘대·권삼득·모흥갑이 명창으로 기록돼 있다. 이중에서 권삼득(완주군 용진면 구억리)과 모흥갑(김제)은 전북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춘대에 대해서는 밝혀진 자료가 없다. 어찌됐든 이들 초기의 명창들에 의해 판소리는 전라도 지역에 정착(?)하게 됐다. 이를테면 전라도의 소리로 자리잡음한 것이다. 판소리의 기원이 되는 남도의 육자배기의 잡가나 세습무당들의 무가가 지닌 음악적 요소와 세련된 사설이 결합한 판소리는 전라도 땅에서 비로소 그 빛을 낼 수 있게 된 셈인데 이러한 배경에는 전라도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정서와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역사, 그 내용이 판소리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어찌됐든 판소리는 송흥록 이후 전라도 땅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넉넉한 생산의 땅에 사는 대가로 [빼앗김]의 부당함과 억압을 당해야 했던 이 땅의 민중들은 삶의 체험뿐 아니라 양반계층에 대한 야유나 풍자까지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판소리를 통해 자신들의 삶의 고난과 한을 풀어내면서 정신적 보상까지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판소리의 형성이 어찌됐건 간에 전라도 소리로 정착한 그 이면에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로는 설명하지 못할 그 무엇, 이를테면 수천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온 체험의 역사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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