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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땅과 사람들] (2)전북의 옛 명창-3

 

전후기 8명창 시대 거치며 절정

 

판소리는 소리꾼으로부터 소리꾼으로 이어져온 대물림의 역사이긴 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철저하게 당대의 청중들로부터 선택되었을때 비로소 지켜진다. 소리가 생성되고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선택받지 못한 소리들은 스스로 허물어지거나, 형태는 남아있으되 불려지지 않는 박제화된 소리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전후기 8명창 시대를 거치면서 판소리는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소리꾼들이 2백여명에 이를 정도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른바 고종시대다. 소리꾼의 양적 확대는 비단 외형적 성장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명창이 되는 길은 더 고단해졌다.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해도 청중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소리꾼과 그의 소리는 도태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시대에 이르러 크게 확대된 소리꾼의 양적 증가는 비단 외형적 성장만 가져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전통적인 판소리 유파를 계승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때로는 그 소리를 배척하거나 혹은 아우르며 통합해내는 치열한 자기 수련을 거쳐 독창적인 예술 경지를 이룩해냈다. 원각사의 출연으로 판소리를 창극형태의 새로운 양식으로까지 개발해낸, 이른바 5명창시대의 특징이다. 일제 치하의 시련기에서 판소리를 지키기위해 근세 5명창시대 소리꾼들이 쏟았던 노력은 눈물겹다. 신파극의 물결로 판소리와 창극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을때 이들은 '협률사'를 만들어 지방순회공연을 나서고, '조선성악회'를 통해 후진을 양성했다. 김창룡 송만갑 이동백 박기홍 김창환 김채만 유공렬 전도성 유성준 정정렬 등이 그들이다. 전북 출신은 전도성과 정정렬. 전도성이 해박한 지식으로 판소리를 기록으로 남겨놓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면, 정정렬은 창극 편곡과 레코드 취입 등 판소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판소리사 기록으로 남게한 어전명창

 

 

전도성은(1864) 고종으로부터 참봉교지를 받은 어전명창이다. 송우룡 박만순 김세종 이날치의 문하에서 공부한 그는 임실군 관촌면 병암리 태생. 성량은 부족했으나 기교가 뛰어났던 그는 판소리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당대의 명창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0여살 아래인 정정렬도 그를 자주 찾아다니며 소리 지식을 배웠다하니 창극 편곡 등 판소리사를 새롭게 개척한 정정렬의 역할에 전도성의 지식이 맞닿아 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전도성이 남긴 중요한 업적도 이 대목에 있다. 그는 판소리 연구의 가장 중요한 문헌자료가 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 편찬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역대 명창들의 일화와 더늠을 모아놓은 이 책에는 '전도성 담'이나 '전도성 방창' 등 그의 이야기와 소리가 직간접으로 자료가 되어 쓰여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면 그는 자신의 소리를 후대에 남겨 놓지 않았다. 어전명창으로서의 자부심 때문이었는지, 그는 다른 소리꾼들과는 달리 창극운동은 물론, 레코드 취입도 외면했다. 시대상황은 변했지만 전통적인 소리와 공연방식을 고집했던 그는 소리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변화들이 판소리를 세속화시킨다하여 거부했던 것이다. 제자를 두는 일에도 소극적이어서 신영채와 김원술이 그의 소리를 받았으나 대를 물려 이어지지는 못했다. 전도성의 소리가 대물림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변모하지 못하면 생명을 얻지 못하는 판소리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창극 운동, 소리 대중화 기여한 진취적 소리꾼

 

 

이에 비해 정정렬은 매우 적극적으로 시대 변화를 수용한 진취적인 소리꾼이다. 일제 치하에서 활동했던 명창들의 대부분이 현대 판소리의 형성에 남다른 역할을 했지만 그중에서도 정정렬의 업적은 빼어나다.

 

군산대 최동현교수에 의하면 정정렬은 "전통판소리의 전승과 발전, 변모,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의 적응을 위한 창극과 신작 소리의 개척, 현대적 감성에 맞는 새로운 창법의 개발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창”이다.

 

그는 '30년 앞을 내다보고 소리하는 사람 '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미래지향적인 소리꾼이었다.

 

그의 출생지는 익산시 망성면 내촌리. 김제 출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의 소리 수련 과정은 특별하다. 스승은 정창업과 이날치. 그러나 당대의 빼어난 명창이었던 이들은 일찌감치 세상을 떴다. 정정렬은 다른 스승을 찾는 대신에 혼자 수련을 쌓아가는 독공을 선택했다. 가뜩이나 고단한 과정이었지만 그는 이 외로운 독공의 세월을 30년 가깝게 지켰다. 나이 마흔에서야 비로소 소리꾼으로 활동했던 그는 쉰이 넘어서야 서울로 갔다.

 

득음에 문학적 재능과 음악적 재능까지 겸비한 그의 특기는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춘향가와 심청가는 독보적인 경지를 평가 받았다. 특히 춘향가의 경우는 보성소리만 빼고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대부분의 바디가 정정렬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을 정도로 그 음악성이 뛰어나다.

 

그는 판소리의 계승과 대중화를 주도했던 조선성악연구회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그는 창극을 편극해 무대에 올렸고 레코드 취입으로 오늘날 명작이 된 음반을 취입해 옛소리를 세상에 남겼다. 춘향전 심청전 흥보전 숙영낭자전 별주부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 당대에 인기를 모았던 대부분의 창극은 모두 그에 의해 편곡된 작품이다.

 

제자로는 김여란을 두었으며 김여란의 소리는 다시 최승희와 박초선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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