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시골에 묻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거문고를 보면서 ‘저걸로 불때서 허리나 지질까’하는 생각도 하고…, 그러다 보면 거문고를 무릎에 앉히고 정신 없이 연주만 하고 싶은 때가 있지요.”
남도 특유의 억양. 거침없이 꺼내놓는 말은 맛깔스럽다. 거문고연주자 위은영씨(37·도립국악원 관현악단 수석). 그는 거문고를 세계적인 악기로 만들겠다거나, 자신이 최고의 거문고연주자가 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엉뚱한 말’부터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가끔씩 찾아오는 슬럼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며 ‘젊음과 희망’이란 단어에도 불편해 하는 사람.
그러나 단단한 옹이가 있다고 해도, 가마솥 물 한 동이도 못 끓일 거문고 몸체지만 잠시라도 그가 의지하고자 선택했던 것은 결국 거문고였다.
“거문고를 조금 알고 나서는 몹쓸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울림이 짧거든요. 중주(重奏)보다 독주에서 단연 돋보이는 악기지만 다른 악기들과 함께 어울리면 소리가 묻히죠.”
거문고를 알게 되면서 회의를 가진 적도 많았지만, 그럴수록 거문고의 매력은 커졌다.
인연을 맺은 건 광주예고 1학년 때. 무용을 배우던 중학교 시절 ‘기생’이며 ‘당골네’를 운운했던 할아버지는 거문고를 배우는 일에 유달리 관대했다.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고금’(古琴)이란 거문고 악보를 남긴 선조 위백규(魏伯珪·1727∼1798)의 족적도 할아버지의 화를 다스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20여년이 흘렀다.
전남 장흥이 고향이지만 그는 전주에 터를 잡은 지 꽤 오래다. 그사이 결혼도 했고, 아들 준석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화통한 말투로 금새 좌중을 휘어잡는 그이지만, 굳이 스스로 ‘부드러운 여자’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는 여리게 보인다. 국악원에서의 하루와 전북대·한국전통문화고에 출강하는 일정만으로도 금새 녹초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가 지금껏 이어온 연주활동은 결코 만만치 않다.
우석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1991년 도립국악원에 입단한 그는 7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도립국악원 관현악단 수석을 놓치지 않았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 사이 서둘러 전북대 대학원도 마쳤다. 전주국악실내악단의 활동에 이어 2년 전, 후배들과 국악이중주단 ‘뜰’도 창단했다. 주류에서 비켜서 있던 거문고의 부활을 꿈꾸는 ‘뜰’의 창단은 국악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도 했다. 이미 일정한 궤도에서 안주해도 될만한 여정을 겪어왔지만, 그는 여전히 이 지역에서 가장 분주한 거문고연주자로 생활하면서 폭넓은 음악활동을 펼치고 있다.
“너무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요즘 힘에 부치는 일이 많지요. 후배들을 키워내는 것보다 아직 제 실력을 갖추는 일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1996년 첫 무대를 시작으로 위씨는 세 차례의 독주회를 열었다. 올해 네 번째 독주회를 열 계획. ‘뜰’의 연주회도 작정하고 있다. 3개월 이상 호흡을 맞춰야 하고, 공연을 앞둔 보름정도는 정신 없이 연습에만 매달려야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별것 아니라는 듯 큰 웃음으로 걱정을 던다. 상대와 눈을 마주치며 힘을 얻는 그는 상대에게 믿음을 심어주면서 자신의 의지를 다지는 예술인이다.
“거문고를 하게 된 것을 제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더 징허게 해야지요.”
언짢은 마음을 담아두고 사느니 차라리 작정하고 말하는 탓에 “말을 할 때마다 손해보는 게 많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이지만,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손부터 덥석 잡고 정을 나누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그는 정겹다.
거문고 술대의 움직임처럼 톡톡 튀고, 술대를 줄에 퉁길 때처럼 장중하고 깊은 맛을 지닌 그는 거문고스럽다. ‘덩’ ‘둥’ ‘등’ ‘당’ ‘동’ ‘징’ 깊은 내공으로 풀어질 만큼 풀어져서 타는 그의 ‘하현 도드리’ 한 가락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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