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에서 답안지를 돌려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제출된 답안지는 채점을 거친 후 반드시 응시자에게 되돌려졌다. 오늘날 과지(科紙)라고 부르는 조선시대 과거 답안지를 개인들이 소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부터 한 유생이 과거에 응시하고 시험지를 돌려받기까지 과정을 따라가 볼까 한다. 임실에 사는 심진표(沈鎭杓)는 나이가 26살이다. 그는 그동안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운이 없었다. 을유년 5월 13일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이번에는 좋은 결과를 얻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시험 볼 차비를 하여 길을 떠난 뒤 그가 시험장소에 도착한 것은 5월 1일이었다. 이렇게 일찍 올라온 이유는 시험이 있기 열흘 전에 본인이 준비한 시험지의 우측 상단에 그 자신은 물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등 사조(四祖)의 인적사항을 적어 담당 관청에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관련사무를 맡고 있던 관리가 그 내용을 검토하고 과거응시에 대한 결격사유 여부를 살펴본 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시험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시험을 치르기까지 열흘 남짓 동안 그는 과거에 응시하러 온 다른 유생들과 함께 과거를 준비하면서 겪었던 이런 저런 일들과, 이번 진사시에 어떤 시제(試題)가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교환하였다. 마침내 시험날이 되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시험에 갈 준비를 하였다. 시험장으로 들어서는데 문앞에서 관리들이 옷과 소지품을 검사하였다. 이를 통과하여 들어가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자신들이 준비해 온 벼루에 먹을 갈고 있었다. 가운데 자리가 비어 있어서 얼른 들어가 앉아 시험 볼 준비를 했다. 조금 지나자 시험관이 들어와 시제를 게시하였다.
'덕이 만물을 생육하고 키운다(陽常居大夏以生育長養爲事)'는 내용의 제목이었다. 그는 머리를 싸매고 답안지를 작성한 뒤 옆을 돌아다 보았다. 다른 응시자들이 끙끙거리며 답안을 적고 있었다. 그는 이번 시험에서 비교적 만족할 만한 답안을 작성하여 편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나올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자 시험관들이 시험지를 거두어 들였다. 이렇게 거두어 들인 답안지는 서리들이 붉은 글씨로 베껴 쓴 다음 시험관에게 넘겨졌다. 혹시라도 시험관이 응시자들의 필체를 알아보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이때 심진표가 쓴 답안지를 평가한 것은 정규회(丁奎會)라는 관리였다. 며칠 뒤 합격자 발표가 있었고 시권(시험답안지)이 심진표에게 전해였다. 심진표가 합격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마을은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고 그의 부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시험답안지를 왜 돌려 주었을까 ? 평가에 대한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시험과 평가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 지금 뒤돌아볼 일이다.
/이병규, 전북대 박물관 고문서팀, 원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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