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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서의 향기]조선시대 사회생활(2)

이정전이 1832년 9월에 남원부사에게 제출한 산송문서. ([email protected])

 

조선후기에는 묘지를 둘러싼 소송이 매우 많았는데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묘지를 ‘산(山)’이라 칭하였기 때문에 묘지를 둘러싼 소송을 산송(山訟)이라고 불렀다. 각 고을의 수령들은 이 산송을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으며 이 때문에 하루도 쉴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1830년 경의 남원부사(南原府使)는 “남원내의 만여호(萬餘戶)에서 제기하는 소송 중에 산송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산송이 이와 같이 빈번하게 일어난 원인 중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당시의 정책에서 찾을 수가 있다. 조선초기부터 집권자들은 산지(山地)와 그 산지에서 자라나는 나무[山林], 내[川]와 연못[澤] 등은 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하였기 때문에 권력이 있는 한 두 사람이 이를 사유하게 되면 백성들의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이를 백성들이 공유토록 해야 한다[山林川澤 與民共之]고 생각하였다. 주인 없는 것을 비유할 때 곧잘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공유인 산지를 백성들이 차지하여 사용하는 방법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어느 한 산지에 자신의 선조를 묻고 그 주위의 산지와 나무 등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이 백성들이 산지에 묘를 쓰고 그 주위를 관리하는 것을 허가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임의로 나무와 풀 등을 벨 수 없었기 때문에 금양지(禁養地)라 하였다. 금양지의 범위는 묘에 묻힌 사람의 지위에 따라 달랐으나 대개 묘로부터 사방 100보(步) - 60보 내외였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풍수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묘의 사산 즉 뒤쪽[主山], 앞쪽[案山], 좌측[靑龍], 우측[白虎]으로부터 상당한 거리 안에는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결국 조선전기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차지케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산송이 점차 빈번하게 제기되었으며 소송 도중에 폭력 행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실학자(實學者)로 널리 알려진 정약용(丁若鏞)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살생 사건의 절반 가량이 산송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개탄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산송의 유형은 투장(偸葬)과 늑장(勒葬)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투장은 돈이나 세력이 없는 평천민(平賤民)들이 밤에 몰래 다른 사람의 금양지에 묘를 쓰는 것을 말하는데 투장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서 봉분(封墳)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늑장은 권세가 있는 사람이 공공연하게 다른 사람의 금양지에 강제로 입장(入葬)하는 것을 말하는데 명당이기 때문에 이를 빼앗기 위해서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산송은 판결 기준이 매우 애매하였기 때문에 대를 거듭하여 제기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판결의 결과가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전경목(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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