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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명창의 후예

 

우리 나이로 스물 아홉, 12월에 태어나 며칠만에 두살을 한꺼번에 먹는 애민살을 감안한다면 정식나이는 스물일곱살. 이 젊디 젊은 소리꾼은 아직 ‘명창’이 실감나지 않는다. 까마득하게 높아만 보이던 명창의 반열에 올랐지만 마음도 편하지 않고 걱정만 더 쌓였다. 여간해 칭찬 한번 듣기도 어렵기만한 무서운 스승은 나이 어린 제자가 ‘까불댈까봐’ 더 엄해졌다.

 

“두세번은 떨어져봐야 허는디…. 암만 생각혀도 너무 빨리 돼버렸어. 인자 지 허기 달렸지 뭐.”

 

아홉살에 소리를 시작해 올해로 20년.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세월을 소리공력에 바쳤으니 연륜으로 치자면 그리 처지는 것도 아니련만 젊은 명창은 내내 겸연쩍게 웃고 있다.

 

“내가 심사위원들에게 부탁도 했었어요. 올해 뽑으면 안된다고. 근디도 이렇게 돼버렸네. 쟈 소리 듣고 심사위원들이 울었다잖여? 사실 잘허기는 참말 잘혔어. 나도 울었당게.”

 

스승은 끝내 속내를 털어놓는다.

 

“쟈 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준 소리요.”

 

좌불안석, 딴짓하며 앉아 있던 제자는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

 

전주대사습이 서른번째 명창으로 등극시킨 장문희씨(29, 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명창이 되는 길은 처절하다. 소릿길의 고단함이야 그렇다치고라도 명창의 반열에 오르는 일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스승의 엄한 가르침이 소리를 열어주는 길이라면 소리를 비로소 얻는 득음은 자기를 극복하는 처절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가능한 세계. 오랜 독공과 수련의 과정에서 신화와도 같은 같은 이야기를 경험하지 않았거나 좌절없이 소리길을 걸어온 명창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 명창은 이름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당대를 풍미하지는 못했을 터이고 그 이름은 허명임에 틀림없다.

 

옛 명창들의 득음을 향한 고행. 그래서 판소리는 더 서럽고 치열한지도 모른다.

 

소리의 완성을 위해 온생애를 쏟았던 명창들의 삶은 당대에서만 빛나지 않았다. 그들은 남루했지만 결코 천박하지는 않았던 예술의 세계를 고스란히 후손에게 넘겼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더러는 천시받고 홀대 당하기 일쑤였던 판소리의 맥은 그들의 대물림으로 지켜지고 발전되었던 것이다.

 

올해 전주대사습 판소리명창부 장원에 뽑힌 장문희 역시 서편제판소리의 대가였던 이날치의 후예다. 스승은 오늘의 판소리를 대표하는 이일주명창. 당대에 이름을 널리 얻지는 못했지만 이일주의 부친 이기중 역시 신영채·임방울·김연수와 교류하며 일가를 이루었던 소리꾼이었다. 이기중은 서편제소리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이날치의 손자.

 

수리성의 탁월한 기량에 최고수준의 소리세계를 갖고 있었다는 이날치는 성음의 절묘함에 빼어난 발림으로 청중을 압도했으며 특히 그의 ‘새타령’은 독보적인 소리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남 담양 출신인 그는 원래 줄타기의 명수였으나 후에 판소리를 배워 대성한 명창이다. 박만순의 수행고수였던 그는 오만하고 고집이 센 박만순보다 연상이었으나 자신을 하인 다루듯 하자 고수의 자리를 박차고, 절에 들어가 수년동안 오로지 소리공부에만 열중해 득음했다고 알려져있다. 그 역시 성격이 호방하긴 했지만 끊고 맺음이 분명한데다 날카로워 ‘날치’라는 이름을 얻었다고도 전해진다.

 

조부의 소리를 이었던 이기중은 1913년에 태어나 1977년에 작고했는데 집안의 소리를 이어 한동안 소리꾼으로 활동했다. 이일주는 부친에 대한 추억이 깊다. 50대까지도 소리를 했다는 그의 부친은 ‘흥보가’ 의 ‘박타는 대목’이나 ‘춘향가’의 ‘이별 대목’, ‘심청가’의 ‘밥 빌러가는 대목’을 빼어나게 잘불러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이일주는 부친이 이름을 널리 알리지는 못했지만 소리 한대목으로 사람들을 마음대로 웃기고 울리는 공력있는 소리를 갖고 있던 명창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새벽이면 소리를 하셨어요. 소리가 참으로 맑고 구성있었지요. 어찌나 소리가 동글동글하던지….” 그는 자신의 소리가 부친의 소리를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하지만 지금 그는 대가의 후예다운 소리를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

 

이일주의 소리를 ‘높고 단단하고 제대로 쉰 치열한 소리’로 내세우는 최동현교수(군산대)는 “요새처럼 편한 것을 좋아하는 세상에서는 치열한 소리가 더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교 위주로 편하게만 하는 소리는 제 맛이 없다. 아무래도 소리는 전력을 다하는 치열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점에서 최교수는 이일주를 세련된 소리, 곱고 부드러운 소리에 마음 두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지키고 가꾸어온, 대단한 소리꾼으로 꼽는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속담은 바로 명창 후예의 자존심을 지키는 이일주에게 꼭 들어맞는다고 최교수는 덧붙였다.

 

이일주는 자신의 소리가 좋은 스승을 만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첫 스승은 아버지 이기중. 그는 자신의 딸을 일찌감치 소리꾼으로 대성할 재목으로 가르쳤다. 7남매 자식들의 앞길을 걱정해 소리까지 작파했던 그가 무슨 마음으로 큰딸을 소리꾼으로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아무튼 소리 배우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딸아이를 무섭게 가르쳐 냈던 덕분에 이일주는 오늘을 대표하는 명창이 될 수 있었다.

 

오늘의 판소리 무대에서 대표적인 여성 명창으로 꼽히는 이일주가 예나 지금이나 힘있고 팽팽한 긴장감으로 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바탕에는 부친인 이기중을 비롯해 박초월과 김소희 오정숙 등 가르치는 일에 철저했던 스승들의 교수법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일주 역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철저하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데다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는 그는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치열해야만 소릿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제자가 되기도 어렵고 소리 한대목 배우는데도 고단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갈수록 그의 문하에는 소리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제자들이 늘고 있다.

 

그동안 그의 문하를 거쳐 명창의 반열에 오른 제자들만도 10여명. 그중에서도 장문희는 그의 수제자로 꼽힌다. 문희는 그의 여동생 딸이다. 아홉살에 그의 집에 와 20년을 지낸 조카는 놀라울 정도로 성음이 좋고 소리를 익히는데도 남다른 기질이 있었다.

 

“당초에는 고단한 소릿길을 가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타고난 재주를 달리 막을 도리가 없어 소리를 가르쳤다”는 이일주명창과 “무서운 큰 이모에게 칭찬 받을 수 있는 일이 소리 잘하는 일 뿐 이어서 소리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조카딸은 참으로 많이 닮아있다.

 

그들 사이에는 또 한명, 혈육은 아니지만 이일주 명창이 믿고 지켜보는 후계자가 있다. 지난해 전주대사습에서 명창이 된 송재영씨(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부단장)다. 스물네살에 제자가 되어 역시 20년을 지낸 그 역시 무서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소리판이 주목하는 든든한 재목이 되어 있다.

 

“단한번도 다른 소릿길을 넘보지 않았다”는 겸손한 제자들과 칭찬에 인색하기만한 스승. 명창의 후예들이 소리판을 지켜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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