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사람들 같이 잔치를 많이 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기쁜 마음에, 슬픈 일이 있으면 슬픈 마음에 음식을 차려놓고 사람들이 어울려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한다. 일찍부터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생활에 익숙한 민족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잔칫상에 올려지는 음식은 지역마다 또 집안마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 어느 지방, 어느 가문에서도 빠지지 않는 음식이 소고기일 것이다. 요즘은 소고기를 마련하려면 인근에 있는 정육점에 가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소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돈만 가지고 가면 언제나 정육점에는 소고기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처럼 소고기를 자유롭고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어느 때부터였을까? 아마도 나이가 50세 이상이신 분들이라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재 50세 이상이신 분들이 상상하고 계실 시기보다도 훨씬 소고기를 먹기 힘들었다. 소고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를 도살해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소를 도살하는 일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여 농업을 국가의 기간 사업으로 생각하고 장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사에 방해되는 행위는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심지어는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관에 탄원을 하고 싶어도 농번기나 추수기에는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그런데 농사를 짓는데 없어서는 안될 소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소는 농사짓는데 있어서 기초가 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도살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소가 수명을 다한다거나, 상처를 입어 회복이 불가능해서 어쩔 수 없이 도살해야 할 경우에는 고을 수령의 허가를 받은 뒤에 가능하였다.(전북대박물관 고문서 07038) 하지만 소를 잡은 뒤에는 소 주인이 임의로 처리할 수 없었다. "거피입본(去皮立本)"이라 하여 죽은 소의 가죽은 관에 바쳐서 북을 만드는 재료로 쓰게 했으며 고기는 팔아서 송아지를 구입하도록 하였다. 이는 소가 없어서 농사를 망치게 되는 일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전라도 장수군 천전면 감나무골에 사는 한경조는 병든 모친이 소의 생간(生肝)을 먹고 싶어하자 수령에게 한 살배기 송아지를 잡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하였다.(전북대박물관 고문서 00926) 이에 수령은 "작은 소를 잡도록 특별히 허락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아마도 부모를 봉양하려는 한경조의 효심에 감명을 받은 듯 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가치관 중에는 충효사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특히 효사상은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않을 만큼 중요시되었다. 그래서 부모를 봉양하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시묘(侍墓)하기 위해서라는 구실을 붙이면 모든 일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소고기를 잡아야 할 경우에는 효사상에 의지하여 호소하기도 하였다.
/안광호(전북대박물관 고문서 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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