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의 처녀들'이 세상을 놀랬다.'
1907년 몸과 얼굴이 심하게 왜곡된 피카소의 추상적인 누드예술은 아름다움의 기준을 혼란시켰다. 12년 동안 여성 누드화에 몰입했던 드가는 '훔쳐보기 기법'으로 묘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자아냈고, 빈센트 반 고흐의 누드 드로잉은 성적인 매력 대신 '고뇌하는 삶의 속살'이 묻어난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전북 지역 작가들에게 누드란 어떤 의미일까.
80년대부터 누드크로키에 전념해 온 서양화가 박상규씨는 '누드는 세계라는 대우주 안의 소우주'라고 소개했고, 누드로 젊은 작가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는 성혁진씨는 "여자나 남자의 몸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다른 데로 전환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팽팽한 긴장감을 누드의 선으로 실어내는 신은아씨는 "공부하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과목”이라고 표현했다. 물이 흐르는 듯 누드의 리듬감 찾아내는 이주리씨는 "누드를 통해 하고싶은 이야기는 끝이 없다”고 한다.
누드의 여전히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서 있다. '예술'이 탄생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외설'로 바라보는 탐욕스런 눈빛.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누드의 아슬아슬한 경계는 더 또렷해지거나 무너진다.
모든 예술의 근원은 자연과 사람. 자연과 가장 가까운 누드는 예술의 원형을 탐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이며, 벌거벗은 인체는 감성을 자극한다. 예술가들에게 누드는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다. 절제된 선에서 아름다움을 이끌어내지만,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집중적인 관찰을 통해 누드의 선과 양감, 구조, 몸 속의 작은 뼈까지도 세세하게 익힌다. 시·지각 능력을 키우기 위해 해부학 책을 파고드는 후배들에게 선배들은 오감을 자극하는 누드 드로잉을 권하기도 한다.
시대 흐름에 따라 누드 드로잉도 유행이 있었다. 정확한 등신 분할과 사실적 묘사로 이성적인 미를 탐색하는 아카데믹한 누드화에서 현대 회화는 작가 개인의 감성을 중요시한다.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나 단순화시키는, 작가의 자유로운 변형이 가능한 시대. 꼭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은 아니다.
적당히 튀어나온 뱃살과 힘을 잃어 처진 가슴과 엉덩이, 통통한 살집도 그 나름의 풍만함과 리듬감이 있다. 작가는 독창적인 해석으로 누드 곳곳에 스며있는 삶의 향기와 사연을 읽어낸다. 보편적 기준을 빗겨난 아름다움이야말로 바로 예술의 힘이다.
전북에도 젊은 작가들이 소개하는 거친 누드가 전하는 숨소리를 만날 수 있다. 초라한 술집의 낡은 작부나 병이 들어 황폐해진 몸을 연상시키는 서양화가 김휘열씨의 누드는 퇴폐적인 듯 하면서도 애달픈 슬픔을 안고 있다. 11년 동안 줄곧 남성누드의 독특한 인체미를 탐구해 온 서양화가 김성민씨는 강인한 남성이 아닌, 고뇌와 좌절이 있는 마른 체구의 남자를 등장시킨다. 벌거벗은 채 축 늘어져있는 모델들이 작가 주변 선후배들이라는 것 또한 그의 누드가 안고 있는 '누드'다.
예전에는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화폭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흔했다. 누드모델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데다, 돈이 없는 미대생들은 서로의 작품에 모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벗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는 순간, 예술은 힘을 잃게 된다”는 신념때문이다.
지난 5일 오후 5시 전주민촌아트센터(관장 허명욱)에서 열렸던 제9회 공개누드크로키 현장. 사람들 앞에 누드로 나선 모델은 더 자유로워지고, 모델의 나체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자유를 꿈꾼다. 누드여서 더 쉬울 듯 했지만, 작가의 역량은 누드처럼 발가벗겨지기도 한다.
누드가 있는 현장은 항상 작은 소동이 일고 숨도 가빠온다. 정지되어 있지만 멈출 순 없다. 핑크빛이 감도는 이 미묘한 형체는 들여다볼수록 더 깊이 빠져들게 한다. 생명이 있는 육체의 맥박 소리, 누드 안에 살아있는 생명력은 오늘도 작가들을 유혹한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