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제사 모시는 일(奉祭祀)이었다. 그 한 예로 양반들의 기록 가운데, 오희문이 쓴 『쇄미록』을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식솔들을 이끌고 이리 저리 피난을 다니며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지경에 이르러도 1년에 25차례나 되는 제삿날은 빠짐없이 지키고 있었다.
이처럼 사대부들이 제사 모시기를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곧 충효사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성리학에서의 효란 모든 행동의 근원(孝者百行之源)이며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배출된다(忠臣求於孝子之家)는 생각 때문이다. 상제례는 곧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효도의 연장행위이며 효행의 주요덕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부모의 유산과 함께 상속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장자에게만 제사의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전기에는 아들 딸 가리지 않고 돌아가며 제사를 지낸(輪回奉祀)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재산도 장자와 차자, 아들과 딸 구별없이 똑 같이 나누어 상속(均等分執)했다. 또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양자를 세우기에 앞서 딸이 제사와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그 딸이 죽었을 경우에는 외손자가 상속받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율곡 이이(1536-1681)는 외가인 신씨의 제사를 지내 외손봉사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정착되면서 부계중심의 종법질서가 확고해짐에 따라 적장자 상속이 일반화 되고 이에 따라 가계 계승을 위해 양자를 입양하는 관행이 정착되어 제사도 양자에게 상속되었다. 16세기의 재산분급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제사를 봉행하는데 쓰일 비용을 제위전(祭位田)라 하여 재산의 일부를 별도로 몫을 지어 상속하였고 아들과 딸들이 균등하게 유산을 분배받았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무렵의 재산분급 문기에는 여자의 몫이 3분의 1로 줄어들고 있다.
사대부들의 제사에 대한 집념은 제기(祭器)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문서는 17세기 중반(1649년 2월) 전라도 남원부 둔덕방에 살던 이유형이 작성한 전급기이다. 이유형은 나이 60이 되도록 아들이 없자 동생의 둘째아들 문주를 양자로 맞아들여 대를 잇고 제기와 집기 등을 전해 주면서 어렵게 마련한 물건이니 지손(支孫)에게는 나누어주지 말고 오로지 종손(宗孫)에게만 물려주어 세세봉제(世世奉祭)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꼼꼼하게 제기의 종류와 개수, 용도와 매득의 경위, 사용자까지 밝히고 있어 제사와 제기까지에도 후일을 염려하여 문서로 기록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사회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조상들의 제사를 일년 중 한 날에 모아서 지내고, 제수음식도 주문하고 제상장소도 콘도나 호텔로 바뀌는 것을 보면 예전과 달리 제사는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어 보인다. 혹자의 눈에는 답답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예법에 따라 정성을 다해 제수를 차렸던 종손들의 고집스런 삶, 제사 때마다 닦고 닦아 윤이 나는 유기처럼 고달팠으나 긍지를 가졌던 종부들의 삶에서 타의든 자의든 제사모시기에 최선을 다했던 그네들의 신념을 현재의 잣대로 재는 것이 가능할지, 아니 타당할지 되묻는다./
/정성미(원광대강사, 전북대박물관 고문서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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