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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포] 화가와 시인의 만남

화가는 시인을 시인은 화가를 보다

화가는 밝게 웃었다. 약속시간보다 늦게온 시인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좀 야위어보이시네요.” “안시인은 좋아보이네.”

 

시인은 시집 한권을 내밀었다. 작년 가을에 펴낸 근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는 시인이 3년만에 내놓는 시집이다. 늘 세상의 모든 것들을 향한 아득한, 혹은 아늑한 그리움을 안고 달려오는 그의 언어들은 이 시집에서 더욱 풍요로워졌다. 화가는 시를 미처 읽지 않고도 표제만으로도 그 풍요로움을 읽은 듯, 넉넉한 미소로 답했다.

 

화가 박민평씨(65)와 시인 안도현씨(44,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서로에게 좋은 선배, 좋은 후배로 존재하는 화가와 시인이 만났다.

 

눈발 날리지 않은 대신 바람 차가워진 태조로, 작은 찻집에서 만난 선후배는 따뜻하게 담소했으나 막 이야기가 제대로 트일 즈음 아쉽게도 인터뷰는 중단되어야 했다. 일상이 바쁜 시인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인터뷰는 이튿날까지 이어졌다. 삶에 위안과 힘을 주는 그림과 시를 만들어내는 예술가들의 만남은 특별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세상사를 이야기하는 동안 밤은 깊었다.

 

 

화가와 시인은 오랜 지기다. 시인이 먼저 화가를 흠모했다.

 

80년대,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때 안씨는 대학 선배 덕분에 박씨를 알게 됐다. 우연히 따라나선 전시실에서 본 그림. 두서너개의 봉우리가 담긴 액자 안에서 안씨는 가슴으로 다가오는 그의 ‘산’을 만났다. 고교시절부터 그림 보는 일을 즐겨했던 안씨에게 그때의 신선한 감동은 충격이었다.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만이 산이 아니었어요. 산이 아닌 존재들이 드러나는 공간을 마음으로 읽으면서 그림이란 이런 것이구나 알게 되었지요.”

 

시인은 그때부터 화가의 그림을 갖고 싶었지만 지금껏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시집 표지화로 화가의 그림을 안았다. 지난 96년에 펴낸 ‘그리운 여우’에서다. 작은 시집 위에 작은 산그림. 그림과 시는 서로를 안아 독자를 만났다. 화가와 시인이 가깝게 만났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수중지월, 거기서 막걸리를 마셨잖나. 좋은 시에 그림을 얹혀주고 표지화 값까지 주니, 참 달게 술을 마셨지.”

 

대화의 마무리는 술이 아니면 술집의 이야기다.

 

안씨는 늘 화가의 ‘산’이 궁금했다. 그의 ‘산’은 친근감이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산, 박씨의 산은 한두개의 봉우리만으로도 산의 전체를 보여주었다. 액자 바깥쪽까지 짐작하게 하는 산은 그의 산만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국화에는 여백이 있고 서양화에는 여백이 없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그림에서는 여백의 아름다움이 강하게 느껴져요. 그 여백은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느낌과 이미지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예요.”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에서 자란 안씨는 김제와 부안의 넓디 넓은 들을 만나기 전까지 평야의 아름다움을 몰랐다. 넓은 평야와 그 평야를 거쳐 만나러가는 바다는 시인에게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박씨는 부안이 고향이다. 어릴적부터 넓은 평야와 아름다운 바다를 가슴에 안고 살아온 그에게는 고향의 산과 바다, 들판 그 모든 것의 존재가 화폭의 힘이 된다.

 

 

둘째날의 만남은 막걸리집에서 이루어졌다. 화가는 어제 받았던 시집의 시 한편을 내놓았다.

 

‘아궁이에서 굴뚝까지는 입에서 똥구멍까지의 길/비좁고, 컴컴하고, 뜨겁고 진절머리나며, 시작과 끝이 오목한 길/무엇이든지 그 길을 빠져나오려면 오장육부가 새카매지도록 속이 타야한다/그래야 세상의 밑바닥에 닿는다, 겨우 -중략- 저 굴뚝은 사실 무너지기 위해 가까스로 서있다 삶에 그을린 병든 사내들이 쿵, 하고 바닥에 누워 이 세상의 뒤쪽에서 술상 차리듯이’(‘굴뚝’)

 

시 한구절 읊고 다시 읊으면서 “시란 얼마나 오묘한 것인가”하고 시인에게 물었다. 절제된 시어로부터 읽어내는 넓은 세계. 화가는 그것이 시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림도 그런 것이예요. 농축시키는 힘.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재구성하는 능력.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어떻게 표현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갈등의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이들의 그림과 시는 서로의 통로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만나는 지점은 같다.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 예술적 동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오랫동안 교사로 활동하다가 퇴직 후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박씨와 역시 교사로 있다가 최근까지 전업작가로 살았던 안씨는 닮은점이 많다. 그 노정의 길고 짧음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의 간극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예술가들의 노정은 특별하지만 역시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일상적 삶의 근원이나 궁극적인 지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세상일에 무관한듯 하면서도 세상의 이치를 굿굿히 지켜나가는 박씨나 세상에 드러나는 갈등을 치유하고 화해시키려는 의지를 줄곧 견지해온 안씨의 작업은 우리에게 다시 세상에 눈뜨게 하는 통로를 열어준다.

 

일상의 반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예술인들이 오히려 세상의 이치를 읽고 모든 존재에 눈뜨게 하는 일에 치열하게 나설 수 있는 미덕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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