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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서의 향기] 고문서 양식 갑오개혁후 그대로

1898년에 노(奴) 유성구가 작성한 자매문기. 갑오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자신이나 처자를 노비로 팔면서 이러한 자매문기(自賣文記)를 작성하였다. ([email protected])

1894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개혁이 이루어진 해이다. 소위 갑오개혁이 그것이다. 전 근대적인 관습과 제도들이 이때에 들어와, 적어도 법제적으로는 모두 폐지되었다. 예를 들어 과부의 재가를 허용한다든지,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다던지, 혹은 공사천의 노비문서를 소각하자는 것 등이 대표적인 개혁안들이었다. 고려와 조선 1,0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과거제도가 폐지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물론 이 갑오개혁이 입안자들의 의도대로 시행 되지는 못하였다. 개혁을 하는 과정에 일본 측의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었고 또 우리 측의 준비 역시 철저하지 못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또 과부의 재가를 법적으로 허용했다고 하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데는 1세기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수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제도가 법령 하나로,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갑오개혁 이후에 작성된 고문서의 양식도 그 이전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계약서 양식이 생겨나기는 했어도 지방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토지나 가옥 등을 매매할 때면 으레 예전과 같은 양식의 명문을 작성하였고, 노비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살 길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나 처자를 노비로 팔았다. 그리고 이때마다 자매문기를 작성하였다. 이들의 삶은 요란한 개혁의 수레바퀴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굴러갔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갑오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양반으로 행세하려 하였다. 양반들은 토지나 노비 등 재산을 처분할 때면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 부리고 있는 노복(奴僕)에게 거래에 관한 권한 일체를 위임하면서 패지(牌旨) 혹은 패자(牌子)라는 일종의 위임장을 써 주었는데 이러한 패지가 갑오개혁 이후에도 그대로 작성되고 있었다. 제도적으로야 노비 문서까지 없애버리고 그래서 이제는 평등사회를 만들어보자고 했지만, 양반은 여전히 양반처럼 행세하려했고 노비들은 여전히 노비처럼 살았던 것이다.

 

대저 전통이라는 것은 끈질긴 면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것이 아니요,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다. 갑오개혁만으로 우리 사회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하는 주장은, 이론상으로야 설득력이 있을 수 있지만, 고문서를 보면 수긍하기 어려운 점들이 너무도 많다. 고문서 연구의 활성화로 이러한 견해가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전통이 아무리 끈질기다는 특성을 지녔다고는 하나 부분적으로는 바로 그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를 들어 위에서 설명한 신분제도와 같이 올바르지 못한 전통은 빨리 사라지게 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조선시대의 일부 양반처럼 권위만을 내세우며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사람들은 전통이라는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송만오(전주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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