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구멍>과 <사라방드>
<내 마음의 구멍> 을 만든 신예 감독의 카메라는 총구를 닮았다. 지구에서의 뻔한 삶을 사는 에릭은 아파트에서 절대 나가지 않고 포르노 제작자인 아버지와 살아간다. 감독은 그 좁은 실내에서 엉망진창 흘러가는 악몽들을 소음과 파격적인 미장센(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데, 성기 수술이나 구토 장면의 지옥도를 생각하면 지금도 구토가 난다. 상상력의 끝을 보여주는 장면들에 보는 이는 안대라도 붙이고 싶은데, 이 여성적 청년은 스스로 눈에 테이프를 붙이고야 만다. 결국 이 불안한 영혼은 에로 배우와 함께 빨래처럼 세탁기에 들어간다. 과연 이들이 정화되어 나오면 배든 비행기든 자신의 손으로 조종할 수 있을까.
현에서 울려 나오는 춤곡처럼 우아한 <사라방드> . 86세의 요한(베르히만은 1918생이다)과 마리안은 30여 년 만에 재회한다. 아, 두 노인의 실내 풍경이 보여주는 자연 채광의 안온함과 자주색 옷의 조화라니. 그래서, 그리움의 시절을 손금보듯 이야기 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이 노감독은 흘러가 버린 시간의 순서를 뒤바꾸는 법 없이 현재적 삶을 오로지 대화로 풀어갈 뿐. 요한에게 옛 애인과의 온유는 있어도 60을 넘긴 아들과의 화해는 없다. 같이 늙어 가는 헨릭은 뻐꾸기가 낳은 아들일까? 늙은이들의 긴장에 그래도 유일한 젊은 피 헨릭의 아름다운 딸 첼리스트 카린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사진으로만 존재하는 2년 전에 죽은 헨릭의 아내 안나의 사진은 노대가의 왕년 흑백 영화의 궤적 같은 신비스러운 장치. 사라방드>
‘난, 이제 죽었는데, 나만 모르는 건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감은 베르히만의 독백. 솔직한 증오심은 존중받아 한다며 불도장 같은 증오를 내뿜는 영감은 끝내 아들과의 화해를 거부한다. 관용이나 얼치기 타협을 보여주지 않는 이 늙은 감독은 도대체 시간을 어디로 건넜을까? 징하다. 저문 뒤에도 무늬나 빛깔이 하나도 변치 않은 베르히만이 걷는 길은 여전하다.
섹스와 실존에 대한 질문의 총알을 쏟은 젊은 감독의 <내 마음의 구멍> 은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 고독이라는 화해 없는 화두를 던진 <사라방드> 는 아들을 죽이고. 두 영화 다 엄마가 없으니, 보이지 않는 이 스웨덴 여인들은 알만 낳고 사라져버렸을까? 아닐 것이다. 세탁기에 몸을 넣는 테스나 황폐화된 인간군을 포용하는 안나의 사랑은 또 다른 형태의 모성일 것. 하여, 이 스웨덴 영화들은 새롭다. 사라방드> 내>
/신귀백(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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