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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전주국제영화제] 실존·고독, 청·장년 두 세계관

<내 마음의 구멍>과 <사라방드>

<내 마음의 구멍> 을 만든 신예 감독의 카메라는 총구를 닮았다. 지구에서의 뻔한 삶을 사는 에릭은 아파트에서 절대 나가지 않고 포르노 제작자인 아버지와 살아간다. 감독은 그 좁은 실내에서 엉망진창 흘러가는 악몽들을 소음과 파격적인 미장센(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데, 성기 수술이나 구토 장면의 지옥도를 생각하면 지금도 구토가 난다. 상상력의 끝을 보여주는 장면들에 보는 이는 안대라도 붙이고 싶은데, 이 여성적 청년은 스스로 눈에 테이프를 붙이고야 만다. 결국 이 불안한 영혼은 에로 배우와 함께 빨래처럼 세탁기에 들어간다. 과연 이들이 정화되어 나오면 배든 비행기든 자신의 손으로 조종할 수 있을까.

 

현에서 울려 나오는 춤곡처럼 우아한 <사라방드> . 86세의 요한(베르히만은 1918생이다)과 마리안은 30여 년 만에 재회한다. 아, 두 노인의 실내 풍경이 보여주는 자연 채광의 안온함과 자주색 옷의 조화라니. 그래서, 그리움의 시절을 손금보듯 이야기 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이 노감독은 흘러가 버린 시간의 순서를 뒤바꾸는 법 없이 현재적 삶을 오로지 대화로 풀어갈 뿐. 요한에게 옛 애인과의 온유는 있어도 60을 넘긴 아들과의 화해는 없다. 같이 늙어 가는 헨릭은 뻐꾸기가 낳은 아들일까? 늙은이들의 긴장에 그래도 유일한 젊은 피 헨릭의 아름다운 딸 첼리스트 카린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사진으로만 존재하는 2년 전에 죽은 헨릭의 아내 안나의 사진은 노대가의 왕년 흑백 영화의 궤적 같은 신비스러운 장치.

 

‘난, 이제 죽었는데, 나만 모르는 건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감은 베르히만의 독백. 솔직한 증오심은 존중받아 한다며 불도장 같은 증오를 내뿜는 영감은 끝내 아들과의 화해를 거부한다. 관용이나 얼치기 타협을 보여주지 않는 이 늙은 감독은 도대체 시간을 어디로 건넜을까? 징하다. 저문 뒤에도 무늬나 빛깔이 하나도 변치 않은 베르히만이 걷는 길은 여전하다.

 

섹스와 실존에 대한 질문의 총알을 쏟은 젊은 감독의 <내 마음의 구멍> 은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 고독이라는 화해 없는 화두를 던진 <사라방드> 는 아들을 죽이고. 두 영화 다 엄마가 없으니, 보이지 않는 이 스웨덴 여인들은 알만 낳고 사라져버렸을까? 아닐 것이다. 세탁기에 몸을 넣는 테스나 황폐화된 인간군을 포용하는 안나의 사랑은 또 다른 형태의 모성일 것. 하여, 이 스웨덴 영화들은 새롭다.

 

/신귀백(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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