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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소라 시인의 연변통신] 윤동주의 여인상

별처럼 멀리서 바라보며 가슴속에 담아

잘 알다시피 윤동주의 ‘서시’, ‘참회록’, ‘별헤는 밤’ 등 주요 시에는 한결 같이 ‘부끄러움’이라는 시어가 고개 숙이고 있다. 이 부끄러움은 인간양심의 가장 미분화된 원형질이며, 자기 성찰의 모체가 된다.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고 부끄러워 차마 말을 못하고 몇 줄의 시로 달랜 문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 없이 많다. 시인 윤동주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매(妹)씨가 되는 윤혜원 여사의 회고에 동주에게도 ‘별헤는 밤’에 등장하는 소녀상처럼 차마 고백을 못하고 가슴에만 품고 지내다 헤어진 구원의 여인상이 있었다.

 

그러니까 동주가 체포되기 1년 전인 1942년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아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용정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왔는데 동생(혜원)에게 사진 속의 단발을 한 여학생을 가리키며 “네 보기에 어떠냐?”고 물었다. 사진을 보던 혜원이 눈을 크게 뜨고 아주 멋쟁이 미인이라고 추켜세우자 비로소 사진을 아버지 앞에 내놓으며 무엇인가 깊이 의논하는 것이었다.

 

이 세 사람 중 앞에 앉은 여학생이 바로 박춘혜(朴春惠)로 두만강 저편의 북조선 온성(溫城)에서 목회일을 하고 있는 목사의 딸이었다. 나머지 두사람은 동주의 친구인 김윤립과 춘혜의 오빠였다. 당시 박춘혜는 동경의 한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역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오빠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다. 이 오빠가 바로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로, 동주는 수시로 그의 자취집을 찾아가 차도 마시고 더러는 춘혜가 정성껏 준비한 저녁상을 함께 하기도 하였다. 비교적 활달한 성품인 춘혜도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동주를 은근히 연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주는 그의 시 ‘자화상’에서처럼 자기연민과 부끄러움으로 차마 표현을 못하고 마음속에 곱게 새겨만 놓았다.

 

한번은 춘혜의 오빠가 동주에게 “내 아직 미장가이지만 내 여동생만한 여성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장가를 가겠다.”라며 넌지시 동주에게 마음을 정하라는 암시를 주었다. 바로 이 때문에 동주가 아버지께 사진을 내놓은 것이며 집안내력 등을 소상히 아뢴 것이다.

 

이후 방학을 마치고 도일한 엽서 한 장이 왔다. 내용인즉 지난 방학 중 춘혜가 온성 고향에서 약혼을 하고 왔다 하니 그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가족들의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저 아득히 먼 별만 바라보던 동주의 내성적인 성격 탓이기도 하였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동주 사망 3년째가 되는 1947년에 윤혜원과 그의 부군 오형범이 함경북도 청진 신암교회에 들렸을 때였다. 그날은 마침 성탄축하예배여서 성도들이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 순서에 따라 독창이 있었는데 독창을 하는 성악가가 뜻밖에도 박춘혜였다. 출연자 소개 때 박춘혜라는 이름에 귀가 번뜩했는데 자세히 보니 사진 속의 모습과 같았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박춘혜 앞으로 다가간 윤혜원이 혹 윤동주를 아느냐고 묻자 박춘혜는 놀라운 표정으로 “어떻게 윤동주 선생을 아시나요?”라고 되물었다. “동주가 바로 저의 오빠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춘혜는 눈을 크게 뜨며 일견 반기면서도 적이 놀라워하는 모습이었다. 박춘혜는 그때 청진에 있는 어느 검사의 아내가 되어 임신중이었으며 신암교회 성가대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었다.

 

한편 옛날 사진 속의 한 사람이었던 오빠의 친구 김윤립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두만강 남쪽에 있는 아우지 고등학교에서 국문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동주가 일경에 체포되기 직전 보내온 엽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엽서에는 시 한편이 적혀 있었는데 그 시가 마지막 절필이 될줄은 몰랐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고 남북 분단으로 김윤립의 생사를 모름과 동시, 엽서 속의 마지막 작품도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이네들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별헤는 밤’에서)

 

그렇다. 동주에게서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멀리 있어야 한다. 저 별처럼 멀리서 바라만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단 하나의 여인 박춘혜도 그저 멀리서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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