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 만난 지역굿 맥 잇는 '젊은명인' 들
어느새 사십줄의 길목에 들어서 있었다. 나이 마흔을 앞두고 있거나 이미 마흔줄에 들어선 사람들로부터 청년다운 패기와 자유로움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반갑다.
여섯살 아홉살 코흘리개 어린시절부터 장고와 꽹과리를 잡았던 꼬마들과 꽃다운 나이 스무살에 사회문화운동에 눈을 떠 풍물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겼던 청년들이 세월을 훌쩍 건너 한자리에 모였다.
전주의 한옥마을 전통문화센터 화명원에서 만난 임실필봉농악의 양진성(40), 남원농악의 김정헌(39), 이리농악의 김익주(38), 고창농악의 이명훈(38)씨.
한눈 팔지 않고 온전히 풍물판을 지키며 지역굿의 맥을 이어온 ‘젊은 명인’들이다.
굿판에서조차 서로 어울릴 기회가 없는 이들의 만남은 어색할 수 밖에 없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격려하면서 금새 하나가 됐다.
진성씨와 익주씨는 대물림으로 풍물을 잇고 있는 2세들. 국가중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인 고 양순용명인(임실필봉농악 상쇠)과 김형순명인(이리농악 설장고)의 뒤를 잇는 후계자다.
젊은 명인의 맏형격인 진성씨는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쇠를 잡기 시작해 나이 사십이 될때까지 한눈팔지 않고 아버지의 길을 좆아온 상쇠.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그는 중고등학교를 거쳐 우석대 국악과와 전북대 대학원을 마칠때까지 풍물만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도중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누군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현장으로 돌아오게 했다”는 그는 도립국악원 단원을 그만두고 10년전 고향 임실 강진면 필봉마을로 왔다. 타악연주자로 각광을 받았던 당시 무대공연과의 결별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당연한 선택이었고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작고한 후 그의 앞에는 단원들의 크고 작은 갈등을 풀어내는 일, 필봉농악의 원형을 지키고 대중화 하는 일이 고스란히 떨어졌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 ’는 위안을 안고 돌아온 고향은 그의 마음까지도 다잡아 앉혔다.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면 지키지 못할 필봉농악을 그는 운명으로 이제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는 이즈음 논 여섯마지를 마련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가 새롭게 더한 결단이다.
익주씨는 김형순명인의 3남 6녀중 유일하게 설장고 기능을 전수했다. 여섯살때부터 장고를 잡았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풍물을 계속해야할지를 두고 방황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끝내 발목잡힐 것 같은 풍물판에서 청춘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방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석대를 그만두고 백제예전에 다시 들어간 것도 타악을 전공하기 위해서였다. 기꺼이 풍물판을 다시 선택한 그는 10년전부터 아버지 대신 설장고를 잡고 있다. 상쇠 아닌 설장고로 농악단을 지켜온 아버지의 그늘에서 어려움 모르고 풍물을 익혀왔다는 그는 앞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짐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맥을 잇기 위해 풀어나가야 할 과제를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정헌씨와 명훈씨는 대학 풍물패에서 풍물을 치기시작했다. 시인을 꿈꾸었던 이들은 성균관대 국문과와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출신. 명훈씨는 전북대 한국음악과에서 다시 우리 음악을 공부했고, 정헌씨는 전북대 대학원에서 풍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정헌씨는 필봉농악이 뿌리내린 강진면 출신. 진성씨와는 초등학교 선후배사이다. 본격적으로 풍물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94년 남원농악의 상쇠 유명철명인의 문하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가족들과 함께 남원에 아예 뿌리내리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 고민도 많았지만 시인 아닌 풍물잽이로 살게 된 것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2002년부터 남원시립국악원 연수원 강사로 임용된 그는 다른 동료들보다 안정된 직장까지 갖게된 것에 감사하며 풍물 운동을 일구고 있다.
여성상쇠로 풍물판의 주목을 받고 있는 명훈씨. 결혼도 미루고 20대와 30대를 온전히 풍물판에서 보낸 그의 열정은 사그러져가는 고창농악의 불씨를 살려 오늘의 마을굿을 대표하는 풍물굿으로 서게했다.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던 고창농악단에서 그의 존재는 ‘희망’. 농악단을 이끌었던 상쇠 황귀언(작고) 명인은 10여년 한결같이 열심인 명훈씨를 드러내놓고 칭찬한번 해주지 않을 정도로 엄한 스승이었지만, 그에게 두말하지 않고 상쇠를 넘겨 주었다. 온갖 고생하며 고창농악단을 일궈온지 10여년. 같은 연배의 후배들과 함께 해온 노정은 고창농악단의 꿈이었던 전수관 건립과 대중화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바쁜 일상을 접고 모처럼 함께 한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20일 필봉농악 전수관에서 열리는 전국의 무형문화재 농악단의 풍물굿축제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진성씨, 새롭게 시작한 강습시간에 쫒기는 익주씨, 여름방학이면 연수에 더 바쁜 정헌씨, 유라시아대장정에 풍물공연으로 참가하고 돌아온 명훈씨는 한결같이 생기있다.
“한번도 말해본 적은 없지만 정헌이나 명훈이를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우리처럼 아버지로부터 대를 물리는 일도 아니고,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훨씬 큰데도 이 어려운 길을 택했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을 한눈 팔지 않고 꿋꿋이 지켜간다는 것, 대단하지요.”
진성씨의 격려에 후배들은 쑥쓰러워했다.
“전통을 지키는 일은 정신의 문제예요. 단순히 과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을 제대로 익혀 생성과 창조의 정신으로 이어나가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 정신을 우리시대에 자리잡게하는데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저희의 선택이 의미있겠죠.”
한여름 땡볕에서 보낸 풍물강습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위에 따가운 여름 햇빛이 숨었다. 의지가 더 단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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